외국어고등학교의 폐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교육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여권 실세의 압박에 외고들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22일 "외고 등 특목고를 특성화고로 전환하고 추첨에 의해 학생을 선발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이달 중 발의하겠다"며 재차 포문을 열었다. 정 의원은 지난 15일 외고를 사교육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하는 법률 개정안을 올 12월 중 발의하겠다며 논란을 촉발했다. 그는 당시 "외고가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면 모든 과목을 잘해야 외고에 입학할 수 있는 외고 입시제도의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의 주장은 '외고의 입시기관화'가 사교육을 부추겼다는 게 핵심이다. 이에 대해 외고 관계자들은 정 의원의 주장이 외고의 설립 취지와 교육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외고는 설립 당시부터 어학영재 양성과 함께 평준화를 보완하는 수월성(엘리트) 교육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다 보니 대학 진학률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는 게 외고 측의 강변이다.

◆어학영재 양성에서 입시 명문고로

외고는 고교 평준화 체제 속에서 수월성 교육을 보완하기 위해 1980년대 설립됐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에 이어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된 이후 △학생 · 학부모의 교육 선택권 제한 △학교 및 학생의 특성을 무시한 획일적 교육 등 평준화 정책의 폐해가 지적됐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82년 '영재교육종합방안 추진계획'에 따라 과학고와 더불어 도입이 검토됐고,1984년부터 어학영재 양성을 목적으로 학력이 인정되는 각종 형태의 외국어학교가 서울에 설립됐다.

하지만 외국어학교 설립 초기 40%에 달하는 전문교과수업 부담으로 학생 이탈이 늘어나자 어학영재 양성에서 입시 중심의 학교로 정체성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1992년 관련 법령의 개정으로 외국어학교가 특목고로 분류되면서 외국어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것도 정체성 변화를 뒷받침했다. 현재 외고는 전체 수업 216단위 중 최소 82단위 이상을 전문교과수업에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고들은 1,2학년 때 전문교과를 몰아 넣은 뒤 3학년 때 이를 줄여 입시 위주의 국영수 중심으로 수업을 운영하고 있어 실제로는 어학보다 대입 준비에 치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또 교육과정 편성지침에 따라 자연계 집중 이수과정이 금지돼 있음에도 대부분의 외고에서는 방과후 수업과 방학 중 외부강사 초빙을 통해 수학 과학 등 관련 수업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A외고 등 일부 외고는 10개 반 중 3~4개 반을 이과반으로 운영하다 정부의 제재를 받고 없애기도 했다. 게다가 외고의 특성상 예체능이나 사회,과학 등 선택교과의 수업 부담이 적어 실제로는 일반고보다 입시준비에 유리한 편이다.

이 같은 운영을 바탕으로 2009년 서울 · 경기 지역 외고의 SKY대(서울대,고려대,연세대) 진학률이 41.1%에 달하는 등 외고는 입시 명문고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5년간 수능시험 3개(언어 · 수리 · 외국어)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최상위권' 수험생 배출 상위권에 대원외고,명덕외고,대일외고,한영외고,안양외고 등 수도권 소재 외고들이 다수 포함됐다. 사법시험 등 국가 고시에서도 외고의 약진은 눈부시다. 최근 입소한 사법연수원 40기의 출신고를 보면 대원외고가 37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역대 법조인 수에서도 대원외고는 322명으로 경기고(441명)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높은 명문대 진학률과 대조적으로 외고의 동일계열 진학률은 터무니없이 낮다. 지금까지 졸업생을 배출한 전국 29개 외고의 동일계 진학률은 30% 미만이다. 특히 대원외고는 지난 3년 동안 15.6%만이 동일 계열로 진학했다. 이는 과학고의 83.8%에 비교해 크게 낮은 수치다. 또 과열된 입시경쟁으로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점도 외고 비판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외고 진학을 희망하는 중학생의 91.9%가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월평균 71만원의 사교육비를 지출해 평균 사교육비인 53만4000원보다 32.9% 많았다.

◆외고 정체성을 둘러싼 진실공방

높은 명문대 진학률과 대조적으로 낮은 동일계열 진학률,파행적인 입시 중심 교과운영은 '외고 폐지론'의 단초를 제공했다. 외고가 제역할은 다하지 못하면서 대학 진학률에만 신경쓰고 있다는 비판이다.

외고 측에서는 이 같은 비판이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외고는 처음부터 어학영재 양성보다 평준화의 보완책으로 설립됐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외고는 과학고와는 구별해 평준화와 비평준화 논쟁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게 외고 측의 입장이다.

설립 배경을 짚어보면 외고 측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평준화 정책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평준화 해체를 검토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대안으로 외고 설립을 추진했다는 게 당시 상황 설명이다. 따라서 외고는 과학고와 달리 처음부터 평준화 보완을 위한 우수명문고 육성이 설립 취지였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현재의 외고 폐지 논란은 고교 평준화 정책과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재철/김일규 기자 eesang6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