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모텔서 해후, "사진 찍었다" 돈 뜯어

2005년 6월 어느날. 단란한 가정을 꾸려 평범하게 살고 있던 30대 주부 A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야." "누구세요?" "나라니깐…"
오랜만에 옛 애인 김모씨의 전화를 받은 A씨는 김씨와 전화 통화를 이어갔고, 이야기 끝에 두 사람은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씨가 말한 모텔 객실로 들어선 A씨는 김씨가 불을 모두 꺼놓고 어두컴컴하게 해 놓아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후 A씨는 다시 전화를 걸어온 김씨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누군가가 촬영해 "불륜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A씨는 두려운 마음에 김씨가 말한 `사진 협박범'에게 돈까지 빼앗기며 수개월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A씨는 결국 경찰에 옛 애인 김씨와 이름을 모르는 협박범을 고소했다.

그런데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옛 애인 김씨는 이번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고 사진 협박범 구모(52)씨가 바로 어두운 모텔에서 해후했던 `옛 애인 김씨'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구씨가 당초 A씨에게 전화를 잘못했는데 A씨가 자신을 김씨로 착각하자 그인 척 행세하며 모텔로 불러냈고, 모텔에서도 불을 모두 꺼 어둡게 하고 김씨인 척 행동하며 A씨의 눈을 속인 것이었다.

구씨는 이후 전화상으로는 옛 애인 김씨처럼 행동하면서 A씨를 직접 만날 때는 사진 협박범으로 행세하는 등 두 사람을 자유롭게 오가며 변신했던 것이다.

일반인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엽기적인 범죄 행각 때문인지 구씨에 대한 재판도 순탄치 않았다.

구씨는 주거침입 및 강간 등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인정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끝에 2007년 4월 결국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A씨는 구씨의 형사 재판이 끝나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북부지법은 최근 구씨에게 "A씨에게 입힌 정신적 피해에 대해 1천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8일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yjkim8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