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촌놈.' 이마트 상품본부 올가닉팀 서성원 바이어(MD=머천다이저 · 38)의 별명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벼와 각종 채소,과일 등을 키워 5일장에 내다팔았고 소 닭과 친구처럼 지냈다. 흙냄새가 좋고 그 흙에서 영그는 과일과 채소들이 사랑스러워 시골을 등질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대 원예학과 졸업 후 이마트에 입사해 먹을거리 담당 바이어가 됐다. 그는 1년에 200일 이상 전국의 산지에서 지내고 연평균 5만㎞ 이상을 자동차로 누빈다. 아내로부터 "이혼하자"는 얘기도 세 번이나 들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판교 톨게이트 근처인 분당으로 이사까지 했다. 지방에 보다 쉽게 내려가기 위해서다.

밤에는 틈틈이 야간 대학원에 간다. 경영학을 배우며 현장과 이론을 접목하려 애쓴다. 9일 오후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에서 서 바이어를 만났다.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은 농부 같았지만 언변은 조리있고 눈빛은 반짝거렸다.


추석이 얼마 전이었는데 바빴겠네요.

"명절에 일시적으로 수요가 늘긴 하지만 미리 예상해서 물건을 들여놓으니까 괜찮습니다. 이번 추석 실적은 별로였어요. 매출이 좋지 않으면 바이어들의 마음도 좋지 않습니다. 사실 실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죠."

입사 후 쭉 바이어 업무를 해왔습니까.

"올해로 바이어 14년차예요. 초기에는 채소를 맡았고 이후엔 과일,그리고 나선 영남 지역에서 '산지 바이어'를 했죠.2005년부터는 올가닉(친환경) 부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원예학과를 나왔는데 학교에서 과일,채소,화훼,조경 등을 배운 게 도움이 돼요. 실질적인 유통의 흐름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바이어가 됐고요. "

'유통의 꽃'이라는 바이어를 해보니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일이 고됩니다. 협력사와 함께 매입할 상품을 고르고 이를 매장에 진열한다고 업무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상품 부족에 대한 추가 공급 등 애프터서비스도 해줘야 해요. 또 도매시장에서 경매가 이뤄지는 새벽 2~3시까지 저를 찾는 전화벨이 울립니다. 그래서 밤에도 휴대폰을 꼭 쥐고 자요. 바이어의 결정에 수십억원이 왔다갔다 하므로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이마트에서는 매년 사과만 20억원어치를 매입하거든요. "

▼바이어가 내리는 결정이 중요하겠어요.

"몇 년간 쌓인 데이터가 결정의 근간이 됩니다. 기후도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죠.농산물 바이어들은 '하늘만 바라보고 산다'는 말도 있어요. 오늘 비가 온다면 2~3주 후의 과일 생산량에 변동이 생기거든요. 과일의 당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이런 경우 일단 계절 과일을 저장 과일로 대체해 매장에서 판촉행사 등을 하고 나중을 위해 비가 오지 않은 산지를 선점해야 합니다. 신선상품은 '선물' 개념입니다. 3개월 후를 예측해야 하거든요. 따라서 과학적 데이터 분석은 물론 직감과 순발력도 필요합니다. "

말씀을 들어 보니 부지런해야겠군요.

"천성이 부지런하지 못하면 못 견딥니다. 겨울날 새벽에 눈을 맞으며 경매 현장에 있다 보면 온 몸이 꽁꽁 얼죠.그뿐인가요. 신규 산지 개척도 쉽지 않아요. 술을 궤짝으로 내놓으며 '이거 다 마시면 물건 주겠다'고 강짜를 부리는 괴팍한 농민들도 계셨어요. 결국 그 술을 다 마시다 기절했는데 다음 날 깨어 보니 농민들께서 '그 정도 오기라면 거래할 만하겠다'며 물건을 주시더군요. "

청과 쪽은 더욱 변수가 많을 것 같아요.

"채소나 육류보다 과일이 훨씬 어렵습니다. 채소나 육류는 품질과 가격만 적정하면 소비자들이 만족하지만 과일은 종류가 워낙 다양한 데다 생산 시기와 생산지별로 품질과 가격이 천차만별이거든요. 물량 운용하기가 쉽지 않고 각종 변수가 많아요. 채소의 생산 주기는 사계절이지만 과일은 3년이에요. 게다가 1년 내내 손이 갑니다. 사과가 열리면 햇볕을 잘 받도록 수시로 돌려줘야 하는 식이죠.밀감이 지난해에는 평년의 2배 이상 생산됐지만 올해는 흉작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바이어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몸은 바빠집니다. 우리 매장에 밀감이 없다? 어휴,상상만 해도 끔찍하죠.신선식품은 좋은 산지를 빨리 확보해야 해요. 깃발 먼저 꽂는 사람이 임자거든요. 그래서 전문 바이어가 필요해요. 경력이 쌓이다 보면 전국의 산지들이 눈앞에 지도처럼 쫙 펼쳐져요. "

아찔했던 기억도 많겠어요.

"지난해에는 사과 때문에 혼쭐이 났어요. 어느 산지에서 꿀이 박힌 것처럼 당도가 높은 사과를 찾아 많은 물량을 선점해 7월에 팔려고 저장해 놨어요. 그런데 당도가 너무 높았던 나머지 사과 속(과육과 과심)이 썩기 시작한 거죠.사실 저희는 몰랐는데 뿔난 소비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어요. 놀라서 판매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생산자와 함께 저장고에 쪼그리고 앉아서 비파괴 당도선별기로 멀쩡한 사과를 일일이 골라내 다시 진열했어요. 20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생산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이런 아찔한 일을 겪으며 바이어는 조금씩 성장합니다. "

영남에서 산지 바이어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산지 바이어란 뭔가요.

"지역마다 사람들 입맛이 다르고 선호하는 음식도 다릅니다. 그래서 이마트에선 2000년부터 지역 소비자가 선호하는 우수상품을 발굴해 전국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산지 바이어'를 전국에 투입했어요. 저는 영남권으로 갔고 제가 발굴해 전국으로 퍼뜨린 상품이 '한재미나리'입니다. 당시 대구 성서점 등 영남지역 3개점에서 연간 매출 6억원 수준이던 한재미나리는 현재 전국에서 판매 중인데 지난해 매출 30억원을 달성했죠."

보통 미나리보다 연하고 향이 진하다는 그 미나리죠?

"그렇습니다. 당시 한재미나리는 보통 미나리보다 10배 이상 비쌌어요. 2~4월 경북 청도의 골짜기에서만 자라서 희소성이 있는 데다 속이 꽉차 있고 향이 은근합니다. 가서 먹어 보니 '이거다!'라는 직감이 들었죠.그래서 시골장에서만 팔리던 걸 모두 빼앗아(?) 이마트에 독점 유통시켰어요. 또 대학,연구소 등에 의뢰해 사계절 내내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습니다. 여름에도 파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흙 밑에 파이프를 깔아 토양을 따뜻하게 만드는 등 환경을 바꿔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해 가격을 낮췄죠.본사에서 저더러 "미쳤다"고 할 정도로 제 머릿속에는 한재미나리 생각뿐이었죠."

과일이나 채소에도 트렌드가 있나요.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사과나 배 등 정통 과일이 인기였으나 이제는 과일의 종류가 다양해졌어요. 토마토의 경우 예전엔 그냥 토마토 하나였지만 이젠 흑토마토,대추토마토,노란 토마토,샐러드용 토마토,조리용 토마토 등으로 나뉩니다. 지역과 품종,용도,입맛에 따라 세분화 · 다각화했죠.채소도 마찬가지예요. "

친환경 먹을거리가 단연 화두인데요.

"이마트에서는 2005년부터 매장에 '자연주의 친환경'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합류했죠.그 전에는 상품을 싸게 매입하자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젠 그 기준이 '안전'으로 바뀌었습니다. 농약 한방울이라도 덜 뿌린 상품을 찾아 전국을 헤매며 농가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습니다. "

바이어로서 가장 뿌듯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열한 살인 제 딸아이가 아토피 피부염으로 5년을 고생했습니다. 하도 긁어서 온 몸에 피딱지가 맺혔고 잘 때 두 손을 묶어 놓을 정도였죠.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게 없었어요. 그러다 별 기대를 갖지 않고 친환경 먹을거리로 싹 바꿨는데 3년 만에 완치됐어요. 원인은 환경오염과 잘못된 식습관이었죠.그때 제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내 아이가 믿고 먹을 수 있는 상품을 내가 직접 고른다'는 자부심으로 일합니다. 언젠가 귀농해서 제 손으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고 싶어요. "

글=김정은/사진=강은구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