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법원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과징금에 대해 취소소송을 제기한 정유회사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회사가 경쟁사들과 가격을 담합했다는 이유로 과징금 부과조치를 당한 건 2004년.'담합기업' 꼬리표를 벗는 데 꼬박 4년이 걸렸다. 소비자들 마음 속에 박힌 '낙인'까지 지워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게 이 회사의 하소연이다.

기업이 검찰,공정위,국세청 등으로부터 어떤 혐의로든 조사를 받게 되면 적어도 세 번은 낙인을 찍힌다. 조사에 들어갔다는 사실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 압수수색 소환 등 조사과정이 중계되고,조사결과가 발표된다. 법정 소송까지 가서 무죄 판결을 받든,조사 결과 '무혐의' 결론이 나오든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를 지워내기는 쉽지 않다.

기관원들이 들이 닥쳐서 사무실을 뒤집어 헤치고 온갖 서류를 압수해 가고,기업인들을 수시로 불러 조사하는 순간 이미 해당 기업에는 '뭔가 구린 데가 있다'는 낙인이 찍히게 마련이다. '아니면 말고'로 끝내면 그만인 권력기관과는 다르다.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어떤 피의자도 무죄로 대해야 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이론상 그럴 뿐이다. 스스로 무죄를 입증할 때까지 세간의 손가락질을 견뎌야 하는 '유죄추정의 원칙'에 냉가슴을 앓아야 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요즘 기업들이 3대 조사기관들로부터 파상적인 공세를 당하고 있다. 비자금,납품비리,세금탈루,가격담합 등 혐의가 몰리다보니 조사가 집중되고 있을 뿐 특정한 의도가 있을 리 없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과 연결지어 '기업 때리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지만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기업들은 이들 기관의 몰아치기 압박에 대해 "뭔가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에 휩싸여 있다. 정부가 서민물가 안정을 내세워 기업들을 몰아붙이면서 불안은 더 커졌다. 주요국들보다 훨씬 낮은 설탕관세를 더욱 끌어내려 국내 설탕가격 인하를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흘리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환경보호를 위해 석유제품의 황 함유량 기준치를 10ppm으로 강화했던 정부가 이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거론하는 촌극이 빚어지기까지 했다. 중국의 저급 휘발유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서라도 휘발유 가격 인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었다.

기업을 다루는 정책이나 조치는 신중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 기업 이미지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나면 외국 경쟁사들에 더없는 호재로 이용되기 십상이다. 지난해 검찰총장이 기업 수사와 관련해 "정교하고 품격있는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정확하게 환부만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식 수사를 강조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금융위기가 채 끝나지 않았고,글로벌 기업들과 생존을 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상황에서 '먼지털기'식 압박으로 기업을 위축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마저 '닦아세우기'식의 무더기 기업인 증인 채택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동네북을 너도나도 앞뒤없이 두들기면 찢어져 버린다. 기업들의 요즘 상황이 걱정스럽다.

이학영 부국장겸 산업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