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어느날.나는 화곡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짓는 기초공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공사는 직영으로 하고 때때로 현장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프가 왔다. 재무장관으로 임명됐다는 전갈이었다. 공사판에서 흙이 묻은 구두를 신은 채로 청와대 접견실로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남 교수,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

남덕우 전 국무총리(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가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삼성경제연구소 출판)를 펴냈다. 재무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19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끈 그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고민,갈등,못다한 뒷얘기 등을 담담하면서도 상세하게 풀어냈다. 남 전 총리를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산학협동재단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기자가 사전에 보낸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직접 타이핑해 건네는 등 열정을 보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운동 삼아 골프를 가끔 치는데 요즘 허리가 아파서 쉬고 있어요. 나으면 다시 칠까 해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걷죠.담배는 끊은 지 20년 넘었네요. 박 전 대통령과 일할 때는 뻐끔 담배이긴 하지만 하루에 두 갑까지 피울 때도 있었지요. 공부도 좀 하고 선진화포럼 일도 보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의 책상엔 깨알 같은 영문 경제학 책과 일본 신문이 놓여 있었다)"

▼답변서를 직접 작성하신 걸 보니 컴퓨터를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1960년대 1세대 컴퓨터를 다뤘던 사람이에요. IBM 같은 회사가 지능형 컴퓨터를 내놓기 훨씬 전이지요. 나이가 들어도 새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합니다. 컴퓨터로 동영상 편집까지 할 수 있어요. "

▼회고록엔 주로 어떤 내용을 담았습니까.

"고속성장 시대의 명암을 제딴에는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제개발과 국방을 우선순위에 둔 박정희 정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먹고 살아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뿐 아니라 저의 신념이기도 합니다. "

▼한국이 최근 10년간 두 차례 위기를 겪었는데 당시엔 위기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당시 위기가 더 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초 월남전쟁이 실패로 돌아가 주변국들이 공산화되자 한국이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고 정치는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정치면에선 유신체제,경제면에서 8 · 3조치(사채동결조치)와 중화학공업 개발,안보면에선 율곡계획(국군장비 근대화계획)과 방위세 신설로 대응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는 내가 맡을 테니 경제장관들은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라'고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

▼석유파동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참 어려웠습니다. 석유파동으로 외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에 외화가 부족해지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고 이 틈을 타 국제 고리채업자들이 몰려왔어요. 수억달러를 조달해 주겠다는 얘기였죠.그때 판단했습니다.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고.외화사정이 절박했지만 3000만달러의 채무를 조기 상환해 여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그리고 악성 차관을 소개했던 유명한 국제 금융브로커와 거래를 금지한다고 재계에 통보했죠.이 말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퍼지자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

▼당시 경제정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고물가,국제수지 악화,저성장의 3중고에 시달렸습니다. 이 가운데 고물가와 국제수지 악화는 피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성장 기조만이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지론이었습니다. 성장기조를 이어가 결과적으로 국제수지가 개선됐어요. 하지만 물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 경제가 위기를 이겨낸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모진 시련에 굴하지 않고 난관을 돌파하려는 우리 기업들의 끈질긴 생명력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게 있었으니 이제 우리 대기업이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요즘 보면 기업의 패기가 예전보다 떨어진 것 같습니다. 역경을 뚫고 세계로 진출하는 강인한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아졌죠."

▼경제환경은 1970년대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지금 역사의 3대 조류는 민주화 정보화 지구화입니다. 특히 정보기술 발달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치면에선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경제면에선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국제면에선 국가주의에서 지구주의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역사적 변환에 잘 대응하고 있습니다. 다만 선진화 과제에 도전하는 노력은 다소 부족해 보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바탕 위에서 지속적 경제성장을 통해 부강하고,자유롭고,공평하고,살기 좋고,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과제입니다. "

▼선진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국회가 비생산적 당쟁을 지양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둘째 과학기술 개발에 경제 운명을 걸어야 하고,셋째 소득분배를 개선하고,넷째 평화적 노사관계를 확립하고,끝으로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념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 국민적 통합을 꾀해야 합니다. "

▼한국 경제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 경제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될 것이란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돌파한 경험이 있고 우리 민족의 자질이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경제뿐 아니라 스포츠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앞으로 세계경제는 아시아가 중심이 되고 그 중에서도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가 핵심이 됩니다. 중국은 세계 최대 경제가 될 터인데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틈새를 공략하고 기술면에서 중국보다 앞서야 하며 선진국에서 기술을 흡수하기 위해 외국기업을 적극 유치해야 합니다. 한국은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동북아 인류(人流)와 물류(物流) 중심지로 거듭나야 합니다. "

▼말 많은 세종시에 대한 해법은 없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세종시를 국제자유도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규제 없는 도시를 만들어 외국기업이 많이 들어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습니다. 토지보상비가 5조원 이상 풀려나간 지금도 기업자유도시를 만드는 게 바람직합니다. 토지보상비 20조원을 행정도시라는 비생산적인 분야에 쓰는 것이 아깝습니다. 장차 통일이 될 텐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역시 행정수도는 서울이어야 합니다. "

▼통일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통일이 되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북한 주민이 대거 남하하면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는 제안이 연해주로 눈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연해주는 토지의 장기 임대와 자치주 성립이 가능해 북한 주민을 상당수 흡수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준비해야 할 건 이념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남한이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를 굳건히 지킨다는 일치된 의식이 있어야 북한의 민주화와 남북한 동질성 확보를 빨리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도 '국가이념이라는 구심점 없이 과연 국민통합이 가능할까? 이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면서 나의 이야기를 마감한다'고 썼다)


박준동/정동헌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