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핵심 사업장인 기아자동차 노조에서 지난 3월 조합비 납부 거부운동이 벌어졌다. 박홍귀 당시 노조위원장이 1만여명의 조합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금속노조에 내던 조합비 31억원을 거부하자며 반기를 든 것.조합원의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해 조합비 납부 거부는 무산됐지만 금속노조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기아차 노조 관계자는 "금속노조가 무리하게 투쟁만 독려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노동자의 대단결을 외치며 2007년 산별노조로 몰려들었던 대기업 노조들이 2년이 지나면서 독자노선으로 선회하고 있다. 연대투쟁을 접고 단위 노조의 실정에 맞는 독자노선을 걷는 게 조합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실리 중시'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각종 정치투쟁에 동원되면서 조합원이 유 · 무형의 피해를 본 터라 "뭉쳐봐야 조합원에게 돌아오는 건 손실밖에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기아차나 현대차 노조가 금속노조와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을 겪고 있는 것도 산별노조에 대한 단위 노조의 거부감에서 비롯됐다. 현대차 노조는 금속노조의 규약에 따라 오는 10월 지역지부로 전환해야 하지만 이 규약을 거부하고 기업지부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쌍용차의 민주노총 탈퇴는 금속노조에 충격을 안겨줬다. 노동자의 힘을 결집시켜 정부와 사측에 대한 교섭력을 키우겠다는 금속노조의 계획은 대기업 노조들이 독자노선을 선택하면서 힘을 잃고 있다.

산별노조의 퇴색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5년간 공동 교섭을 벌이며 산별교섭체제를 정착시켜왔던 보건의료 산별 노사도 임금협상이 결렬된 뒤 개별교섭을 맺고 있다. 10년간 벌여온 금융 산별교섭 역시 노조 간 입장이 갈리면서 임금 교섭이 난항을 겪고 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기업 노조들이 오로지 힘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산별노조에 가담한 측면이 강하다"며 "이제 와서 기업별 노조 때 쌓아놓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산별노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민주노총 탈퇴 도미노 현상도 개별 단위 노조의 독자적인 노동운동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민주노총을 탈퇴한 노조는 올 들어서만 모두 21개.서울메트로도 10월 중 민주노총 탈퇴 여부를 찬반투표에 부칠 예정이어서 앞으로 민주노총 탈퇴는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지난 4월 민주노총을 탈퇴한 인천국제공항 노조의 강용규 위원장은 "정파 간 주도권 싸움만 벌이는 민주노총에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며 탈퇴 당위성을 강조했다. 정치투쟁과 이념투쟁에 빠져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민주노총과 결별하거나 산별노조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기로 한 노조들은 '실리'를 원하는 조합원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상급단체의 지침에 따라 각종 정치투쟁에 참여한 결과는 상처뿐이었다. 조합원 입장에서는 정치투쟁으로 얻는 게 없었다. 계급투쟁이 명분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노사 풍토도 많이 개선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심(勞心)은 고용안정과 복지 개선 등 실리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쏠리고 있다.

실제로 독자노선을 선언한 기업노조들은 많은 실리를 챙기고 있다. 우선 조합비의 상당액을 조합원의 복지를 위해 쓸 수 있다. 2004년 민주노총을 탈퇴한 현대중공업 노조는 매년 상급단체에 납부하던 조합비 4억원을 적립해 조합원 휴양소를 건립 중이다. 또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오던 투쟁 지침이 없어져 노사관계 안정뿐 아니라 생산현장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 이들 노조는 민주노총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상생의 노사문화를 선언할 수 있는 점도 탈퇴 이유로 들고 있다.

권혁태 노동부 노사갈등대책과장은 "일선 노조가 민주노총과 결별하는 것은 결국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이라며 "앞으로는 기업의 생산성과 고용안정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동현장에 독자노선 바람이 불면서 상급단체 가입 노조원 수도 감소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경우 2007년 68만2000명을 기록했던 조합원 수가 지난해에는 65만8000명으로 줄었다. 한국노총 조합원 수도 2005년 77만명을 정점으로 2007년 74만명,2008년에는 72만5000명으로 감소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고경봉 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