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는 김모씨(29)는 2년반째 졸업을 미루고 있다. 2007년 3월에 졸업했어야 정상이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취업에 도전하는 게 유리할 것 같아 캠퍼스에 남아 있다. 김씨는 4학년이 되던 2006년부터 해마다 100여개 업체에 입사원서를 넣었지만 고배를 들었다. 졸업에 필요한 전공학점을 모두 이수한 그는 취업에 도움이 될까 경영학과를 복수전공 중이다. 컴퓨터 정보처리기사 1급 자격증과 종합재무설계사(AFPK) 자격증을 따 누구보다 취업에 자신이 있었지만 해마다 취업의 길은 멀어지는 것 같아 속을 태우고 있다.

◆좋은 '스펙'과 취업은 별개

김씨처럼 복수전공,인턴십,자격증 등 각종 '스펙'을 쌓는 대학생들이 많다. 취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실제 노동시장 동향을 분석해 보면 스펙이 취업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채창균 연구위원은 "한국고용정보원이 2006년부터 실시한 '대졸자 직업이동 경로조사'에 참여한 22만8521명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자격증 소지 대졸자 취업률이 미취득자보다 낮았다"고 밝혔다. 4년제 대졸 자격증 취득자의 취업률은 남성이 86.6%로 미취득자 90.1%보다 3.5%포인트 낮았다. 여성은 각각 83.0%와 86.3%로 취득자 취업률이 미취득자에 비해 3.3%포인트 떨어졌다.

좋은 스펙 졸업자의 취업 부진은 부전공 복수전공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4년제 대학 여자졸업생 중 복수전공한 학생들의 취업률은 82.6%로 그렇지 않은 학생의 취업률 84.4%에 비해 1.8%포인트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남자 졸업생의 경우 복수전공자(88.8%)가 그렇지 않은 학생(87.7%)보다 취업률이 약간 높았지만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차이는 아니라고 채 연구위원은 설명했다.

학생들이 주요 경력으로 내세우는 인턴십도 취업에 큰 도움은 안됐다. 재학 기간 동안 인턴십 등으로 직장생활을 경험해 본 학생들의 취업률은 4년제 대학 남자 졸업생의 경우 87.1%로 경험하지 않은 학생의 취업률 89.7%에 비해 2.6%포인트 떨어졌다. 여성의 경우 격차가 더욱 커 인턴십 경험자 취업률(82.8%)이 미경험자 취업률(87.3%)에 비해 4.5%포인트나 낮았다.

◆학점과 해외연수는 취업에 도움

취업률에 실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스펙'은 학점과 해외연수 경험 정도였다. 4년제 대학 졸업생 중 학점이 최상위권(평점 평균 4.0 이상)인 학생의 취업률은 남성 92.6%,여성 85.6%로 남녀 모두 중위권 이하(남성 85.5%,여성 82.5%)에 비해 크게 높았다. 전문대학 졸업생도 최상위권 학점을 딴 학생들의 취업률(남성 91.4%,여성 88.1%)이 중위권 이하 학생(남성 · 여성 각 84.4%)보다 높아 통계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보였다.

해외연수 경험을 한 4년제 대학 남자 졸업생의 취업률은 91.8%로 그렇지 않은 학생 87.2%에 비해 4.6%포인트 높았고,여자 졸업생도 해외연수 경험자의 취업률(86.7%)이 미경험자(83.3%)에 비해 3.4%포인트 높았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직능원 연구진은 "학점이 좋은 학생은 성실하다는 긍정적 신호로 작용해 취업 가능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해외연수의 경우 어학 실력을 높여주는데다가 글로벌 감각까지 갖출 수 있다는 점이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해결 · 의사소통 능력 중시

대학생들이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 쌓은 스펙이 실제 취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이유는 뭘까. 연구를 진행한 채 박사팀은 "기업들은 학생들의 스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업이 중시하는 요인은 문제해결 능력,의사소통 능력 등인데 이런 요소들은 자격증이나 복수전공 등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직능원이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업들은 인문사회계열 대졸 신입사원의 경우 문제해결 능력,대인관계 능력,의사소통 능력,자기관리 및 개발 능력 등이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이공계는 기술 능력,문제해결 능력,정보 능력,의사소통 능력 등을 중시했다.

자격증이나 인턴십 등은 취업이 안 될수록 이력서를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쌓여지는 스펙에 불과하며 기업 인사담당자에게는 오히려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 인사팀 관계자는 "한국 대학생은 전공과목에 집중해야 하는 3~4학년에 토익 높은 점수 받기 등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에서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대학생들이 대학 4년간 취득하는 140학점 가운데 전공학점은 79학점으로 비중은 56%에 불과하다. 이는 인도(총 취득학점 대비 전공학점 비율 95%),핀란드(71%),미국(64%) 등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어학의 경우 삼성전자 부서장의 94%는 '2006~2008년 입사한 신입사원들이 2000~2004년 입사자에 비해 외국어 실력이 향상됐다'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조직 적응성은 부서장의 51%가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 연구위원은 "복수전공이나 자격증 인턴십 자체가 무의미하다기보다는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학생들의 과도한 스펙 쌓기 노력이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며 "대학교육이 졸업생의 현장 적응력을 높이는 형태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뚜렷한 취업 목표를 세워 놓고 관련 과목을 중심으로 전문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기회가 된다면 기업체 인턴십을 통해서 실무를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졸업 전에 보완하는 형태로 입사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조언했다.

포스코 관계자도 "스펙보다는 기본적 소양이 중요하다"며 "전공과 함께 이과면 문과,문과면 이과 등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