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초 낭가파르밧(8125m) 정복후 하산길에 사망한 고미영씨의 히말라야 등반 파트너 김재수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대장(48)이 고인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27일 오전 네팔로 향했다.그는 출국전날 오후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매고 한국경제신문을 찾았다.

15kg의 배낭을 메고 8000m 산을 오르는 만큼 체격이 건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키 175cm,몸무게 61kg의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얼굴은 불에 그슬린듯 까맣게 타 있었다.동상의 흔적이다.김 대장은 네팔 현지에서 준비과정을 거쳐 9월 말께 안나푸르나(8091m)로 향한다.등정에 성공할 경우 내년 봄 가셔브룸Ⅰ(8080m),가셔브룸Ⅱ(8034m)에 차례로 올라 고인이 못다 이룬 14좌 완등을 대신해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 고미영 대장 사고후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나.

“어떻게하면 미영이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할수 있을까,미영이의 영혼이 있다면 무었을 원할까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그런 와중에 우울이 왔습니다.우울증은 밥먹고 할 짓없는 사람이나 걸리는 병인줄 알았는데….내가 나약한 사람은 아닌데,고미영의 사그러진 열정이나 2년6개월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일 등을 생각하니 허무감이 밀려왔습니다.”


- 요즘은 평정심을 찾았나.

“이래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미영이 부모님을 한번 만나보자고 맘 먹고 얼마전 새벽에 차를 몰고 전북 부안으로 달렸갔습니다.그때 미영이 아버님이 딸은 잃었지만 아들하나 얻었다고 생각하겠다.네가 양아들이 돼 줄수 있겟느냐고 말씀하셔서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예’라고 대답했습니다.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군요.”


- 지금 컨디션과 기분은 어떤가.

“전에 원정 나갈때는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들떳는데 이번에는 쓸쓸하고 무겁네요.그래서 장비 챙기는 일도 미루고 미루다 어젯밤 늦게서야 했습니다.몸 상태는 좋은편입니다.히말라야와 함께한지 벌써 20년째입니다.전에 비해 체력은 약해졌겠지만 등산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에 문제될게 없습니다.힘센 이등병보다 힘없는 병장이 낙오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보면 되죠.”김 대장은 이번원정에서 후배 문철한씨,네팔 현지 셰르파와 동행한다.


- 마음이 그렇게 무거운데 꼭 등정을 해야하나.

“사람들은 미영이의 못다이룬 꿈을 누군가 대신해줘야 하는게 아니냐고들 말합니다.아마도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들 말하리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미영이는 이미 고인이 됐고,누구도 그를 대신해서 꿈을 이뤄줄수는 없습니다.나 또한 미영이의 기록을 대신해주기 위해 간다기 보다는 유가족과 나 스스로의 위안을 찾기 위해 떠나는 건지도 모릅니다.사실 미영이는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위험하고 힘든 등정에 나서는걸 원치 않을 지도 몰라요.그럼에도 누군가 가야한다면 미영이는 내가 가 주길 원할 것이라 믿습니다.”


- 고인을 대신해 산에 오르는 만큼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클것 같다.

“전에는 자연을 이겨보려고 무모하게 덤비곤 했습니다.하지만 요즘은 자연에 순응하기로 맘을 고쳐먹었어요.등정은 내 의지나 노력만으로 되는게 아니더군요.자연앞에 겸손해야 한다는걸 깨달은거지요.이번에도 신중하게 등반 할 생각입니다.현지에서 좀더 꼼꼼하게 준비하기 위해 출발 일정을 예정보다 조금 앞당겼습니다.현지 사정도 면밀하게 파악하고,등정 루트도 직접 만들어야합니다.”


- 고미영씨 유품도 가지고 오르나.

“카트만두에 옷가지 등의 유품이 남아 있습니다.그중 일부와 사진을 가지고 올라갈 생각입니다.”
김 대장은 고인의 사진을 넣을 수 있는 투명 주머니가 달린 특수 방한복을 입고 정상에 오를 계획이다.


- 고인을 위해 안나푸르나 정상에 유품을 남길건가.

“그 추운곳에 유품을 모두 묻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그건 등정을 멈추고 여기에 남아 있으란 얘기나 마찬가지기도 하구요.남은 봉우리를 모두 오른 후 마지막 봉우리에 유품 하나정도 남겨 히말라야를 추억하게 하고 싶습니다.”


- 다른 산악인들도 정상에 다녀간 흔적을 남기나.

“요즘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줄었지만,그래도 정상을 밟았다는 증거품을 남기곤 합니다.깃발이나 소품같은 걸 묻거나 바위 사이에 끼워둡니다.정상에 올랐을때 다른 사람이 남겨둔 물건을 보면 가지고 내려오기도 합니다.대신 내 물건을 그 자리에 남겨두죠.기상 악화 등으로 사진을 못찍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게 등정 증거품이 되는 겁니다.”


- 주변에선 너무 기록을 의식해서 생긴 사고란 비판도 있었다.

“목숨을 담보로 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없습니다.물론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할만하니까 하는거죠.경쟁이나 욕심없이 세상은 발전하지 않습니다.기업이나 기술도 경쟁하기 때문에 발전하는거잖아요.그걸 무리했다고 몰아붙이면 안됩니다.그럴거면 시작할때부터 충고하고 막았어야죠.그런 비평은 사고가 났기때문에 하는겁니다.만약 성공했다면 대단하다고 말했겠죠.결과를 가지고 하는 비평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대단하다고 평가해줘야죠.”


- 14좌 완등을 앞두고 있는 오은선씨와의 경쟁의식도 있었을텐데.

“오은선씨는 미영이의 한해 후배고 고향도 같은 전북입니다.경쟁의식이 없을수야 없겠죠.그건 선의의 경쟁이기도 하고,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경쟁이기도 합니다.그래서인지 요즘 언론에서 오은선씨가 고미영을 대신해 14좌를 완등한다는 보도를 많이 합니다.하지만 누군가 미영이의 꿈을 대신 이뤄주겠다고 나서는건 유가족들에게는 위안이 아니라 아픔이 됩니다.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있다면 가슴에 담아두고 말을 아꼈으면 좋겠어요.언론에서도 그런 보도를 자제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 고미영의 원래 목표가 뭐였나.

“미영이의 목표는 세계 최초 14좌 완등이 아니라 14좌를 최단시간에 오르는거였습니다.”


- 김 대장은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언제나 미영이가 성공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의 그림자가 돼서 도왔습니다.정상에 올랐을때도 언론에는 미영이를 내세우고 난 숨어있었죠.미영이가 잘되면 한국의 등반 역사에 새로운 기록이 될거라 믿었습니다.그게 내 목표이기도 했구요.한번은 미영이가 언론 인터뷰도중 동상으로 새까맣게 변한 내 발을 보이며‘고생은 김재수 대장이 더 하는데 내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며 눈물을 보이더군요.날 깊이 이해해 주는 그녀를 돕고 싶었습니다.”

김 대장은 고씨와 2년 반동안 히말라야 10개 봉우리에 올랐다.고씨가 오른 히말라야 봉우리 11개 중 초오유(8201m)만 동행하지 않았다.김 대장은 내년 여름 초오유에도 도전할 계획이다.이 등정까지 성공하면 2007년 5월 고인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이후 3년 2~3개월만에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하게 된다.이는 최단기간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이다.한국의 박영석 대장은 8년,여성산악인 최초 14좌 완등이 유력시되는 오은선 대장도 내달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면 12년 만의 기록이다.


-고미영씨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지난 2007년 초 경남지역에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결성했습니다.그때 미영이로부터 연락이 왔죠.지난해 경험 미숙으로 등반에 실패했다며 합류하고 싶다고 하더군요.그래서 대원들의 의견을 듣고 받아들였습니다.다만 개인종목인 스포츠클라이밍을 하던 사람이라 단체종목인 고산등반을 하면서 팀원들과 융화 될 수 있겠나 싶었습니다.그래서 팀원들과 같이 움직인다는 조건으로 허락했죠다.그리고 출발일인 3월 12일 인천공항에서 첫 인사를 나눴습니다.”


-2년반이나 같이 등정하게된 계기는.

“에베레스트 등반도중 미영이가 자신의 계획을 많이 얘기했습니다.목표는 14좌에 오르는 거라고.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죠.그런데 미영이가 아주 강력하게 말하더군요.그러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자신보다 어린 사람은 싫다며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정식으로 요청하더군요.당시 미영이의 소속사인 코오롱에서도 매니저를 구하고 있었습니다.하지만 난 사업도 해야하고,14좌를 다 오르고 싶은 욕심도 없다며 거절했죠.그럼에도 미영이가 전진캠프에서 회사에 전화해 김재수 대장을 자신의 매니저로 해달라고 아주 강력하게 얘기하더군요.내 허락도 받지 않고서요….그리고 곧 파키스탄 원정을 떠나야하는데 도와달라며 매달렸습니다.그래서 딱 한번만 더 같이가자고 한것이 계속 이어졌죠.”


- 고미영씨가 초록빛 꿈을 안겨준 사람이라는데,어떤의미인가.

“미영이는 14좌 완등 후 전문강사로 대학 강단에 서는게 꿈이었습니다.끊임없이 꿈 얘기를 하더군요.그래서 나도 내꿈이 뭔지 생각하게되었죠.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긴하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건 등산밖에 없습니다.그래서 고산등반학교를 만드는 꿈을 갖게 된겁니다.히말라야 정상에 오르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거죠.이런 계획은 미영이를 통해 구체화됐습니다.고산등반학교가 실현된다면 우리나라 산악문화에 또 다른 장르를 개척하게 될 것이다.”

김재수 대장은 김해에서 22년째 신발 안창을 만드는 백산실업 사장이다.연매출은 50억원 정도.


- 요즘은 일반인들도 히말라야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그분들의 소원은 히말라야 중턱이 아니라 정상까지 오르는것입니다.이런 분들의 꿈을 이뤄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내가 계획하고 있는 고산등반학교죠.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고산등반학교의 상업성을 비판합니다.외국은 벌써 10년전에 시작돼 성업중인데도요.어떤 분들은 쉬운 루트로 등정하는게 무의미하다며 극한등반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아직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 산악계에서 이는 죽으러 가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고미영씨와는 연인이란 말이 있었는데.

“연인이라고 표현하면 더 애틋해지기 때문에 언론에서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하지만 미영이와는 연인 이상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산사람들은 한번만 같이 원정을 다녀와도 평생을 형제처럼 지내는데,미영이와는 생사를 같이하며 열번이나 등정했다.등산중에는 서로의 생리현상까지 보게 되는데,이 정도면 연애감정 같은게 끼어들 여지가 있겠어요.”


- 산과 인연을 맺게된 계기는.

“지난 1977년 고1때였어요.누나가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는 등산을 해보라고 권유해서 시작했습니다.지난 32년 동안 다른 취미는 한번도 가져보지 못하고 오로지 산에만 올랐습니다.한동안은 기술등반인 암벽·빙벽등반을 즐기다 1989년 히말라야를 처음 만나고 장르를 바꾸게 됐습니다.그리고 이듬해 바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했습니다.한번만에 꿈을 이루고나니 그동안 혹독하게 훈련한게 아까워 매년 히말라야에 올랐습니다.그러고보니 내가 미영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네요.”


- 혹독한 훈련이란.

“내 심폐기능은 일반인 수준입니다.지난 89년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트레킹 할 기회가 있었는데,5400m 정도 오르니 부종,두통,구토,불면증 등 온갖 고산병이 다 오더군요.그때 난 고산등반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면서도 그걸 이겨보고 싶어 밤낮없이 뛰며 훈련했습니다.그리고 이듬해 원정을 갔더니 고산병 증상이 전혀 안느껴지더군요.난 타고난 등반가라기보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경우에 가깝습니다.”


- 산악인으로서 어떤 점이 가장 어렵나.

“가정적인 문제입니다.위험한 곳에 오르니 부모에게는 자식의 도리를 못하는 불효자이고,대부분의 산악인이 생활비를 부인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남편으로서도 빵점이죠.1년에 두세번 나가면 6~7개월을 산에서 살게되니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습니다.아버지로서도 최악이죠.미영이 사고후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어머니와 아이들의 걱정이 부쩍 커졌습니다.”


- 아이들은 몇인가.

“큰 아들이 스물넷,둘째딸이 스물하나,셋째딸이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아내와는 지난 2006년 이혼서류를 제출하고,2007년 합의이혼했습니다.성격차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산에 다닌게 가장 큰 원인이었죠.그동안 주위에서 이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미영이 사건 이후 밝혀지면서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하지만 미영이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별거상태에서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 작년 여름 K2봉 원정에서 후배들을 여럿 잃었고,고미영 대장도 잃었다.산이 겁나지 않나.

“산은 무섭지 않은데 자연이 겁납니다.눈사태로 후배들을 잃었을때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그런데 미영이는 사람의 실수 요소가 있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그래서 자책감도 더 크구요.”


- 산악인으로서 후회같은건 들지 않았나.

“왜 안들었겠어요.등산에 쏟는 열정을 다른데 퍼부었으면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하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겠지요.사실 미영이가 사고나기 전만 해도 산에 다니는게 가장 행복했었으니까요.”


- 이번 등정후 계획은.

“미영이가 못오른 3개봉 정복과 내 개인 목표가 섞여 있습니다.미영이가 하고 싶어했던게 히말라야 14좌 완등,고산등반학교 설립,7대륙 최고봉 정복이었습니다.난 이미 5대륙 최고봉에 올랐습니다.남극과 오세아니아주만 남았죠.이번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면 10월 중순께 귀국할 계획입니다.그리고 올 겨울 남극이나 오세아니아에 중 하나에 도전하려구요.내년 봄엔 유일하게 고미영과 함께하지 않았던 초오유(8201m) 등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계절별로 나눠 차례로 오를 생각입니다.”


- 네팔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는가.

“카트만두에 일부 장비가 보관돼 있습니다.거기서 장비를 보충하고,식량 준비하고,셰르파 등 스텝선정 과정을 거쳐야죠.”


- 셰르파도 정상까지 같이 가는건가.

“그들도 나와 함께 정상까지 같이 오릅니다.등반에 성공하면 그들이 국내 언론에는 나오지 않지만 현지 언론에는 보도되고 등정 기록에도 남습니다.우리가 세미프로라면 그들은 프로라고 보면 됩니다.”


- 등정 비용은 얼마나 드나.

“미영이와 나 둘을 기준으로 했을때 8000만원 정도 들었습니다.산소를 사용하면 1억원 정도 필요하죠.2억원이 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그건 초 호화판 등정입니다.대형 헬기 한대 부르는데 왕복 5만달러면 충분합니다.셰르파에게는 3000~4500달러 정도를 지급하고요.그 외에는 큰 돈이 들어갈 곳은 없습니다.”


-목표를 다 이룬 후에도 등산은 계속 할건가.

“올라야 할 산은 무궁무진합니다.히말라야만해도 동서로 2700km,남북으로 500km나 됩니다.”


- 고산등반학교 설립도 추진할건가.

“이번 등반 마치고 돌아와서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돈을 받기 때문에 상업등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그런데 신경쓰면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산은 순수해야 하다고들 말하는데,산에 대한 내 마음은 아주 순수합니다.다만 고산등반학교는 위험한 등반을 안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는 것 뿐입니다.”


- 등산하는 발걸음이 허전할 것 같다.

“그렇습니다.높은 산에 오르다보면 환청이나 환각 현상이 일어나는데,만약 환청이 들린다면‘대장님 힘내세요’란 미영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김 대장은“옛말에 마음이 떠나면 꿈에도 안나타난다는데,사고후 한번도 미영이 꿈을 꿔보지 못했다”며“내가 2년6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사진도 찍어주고,등산도 도와줬는데 한번도 꿈에 안나타나니 서운하다”며 농담 섞인 웃음을 짓다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