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는 한 달 전 일만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회사 앞 술집에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직장 얘기를 한 게 화근이었다. 취기가 오른 이 대리는 앙숙 관계인 직속 과장에 대한 불만을 육두문자로 늘어 놨다. 문제는 바로 뒷자리에 과장의 입사 동기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대리가 내뱉은 말은 고스란히 직속 과장의 귀에 들어갔다. 이 대리는 한동안 찍소리 못하고 납작 엎드려 지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한마디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여자 후배를 섣불리 칭찬했다간 성희롱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선배에게 듣기 좋은 말만 늘어 놓았다가는 아부형 인간으로 치부된다. 그렇다고 중간이라도 간답시고 입 닫고 살 수도 없는 노릇.그럴 듯한 입담으로 주목받는 동료들에게 뒤처지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김 과장 이 대리가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지만,오히려 세 치 혀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적지 않다.

◆품평회하면 본전 찾기 힘들어

화장품 유통 회사에 다니는 박모 과장(37)은 최근 들어온 여자 신입 사원을 칭찬했다가 낭패를 봤다. 신입사원 연수가 끝난 뒤 여자 상사가 박 과장에게 "그 친구 대학 후배인데,어땠어?"라고 물어 왔다. 있는 그대로 "걸물이던데요"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일파만파를 불러일으켰다. 빼어난 미모에 선배들에게 싹싹하기까지 해 '정말 훌륭하다'는 뜻으로 쓴 말이었지만,여성들 사이에서는 묘한 뉘앙스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여자 상사는 그 신입사원에게 "회식 자리에서 어떻게 놀았기에 그런 지저분한 평가를 받느냐"며 나무랐다. 당황한 신입사원은 급기야 사표를 냈다. 박 과장은 "일주일 동안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어서 간신히 다시 출근하게 만들었다"며 "같은 어휘라도 남자와 여자가 받아들이는 게 천양지차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토로했다.

누군가를 띄우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희생 어법'도 조심해야 할 습관 중 하나다. 대기업에 다니는 최창수 차장(43)은 부부 동반 회식 자리에서 말실수 하나로 후배들에게 인심을 잃었다. 술자리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이 대리의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최 차장은 이 대리 부인에게 "우리 부서에서 이 대리가 일을 제일 열심히 하며 잘한다"고 말한 뒤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웬걸.주변은 갑자기 싸늘해졌다. 결과적으로 인사고과 날짜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그것도 부인들까지 다 있는 곳에서 '평가'로 들릴 만한 발언을 한 꼴이었기 때문이다.

◆메신저와 휴대폰에서도 '헉' 연발

의도치 않은 막말은 면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갈수록 의사 소통의 수단이 다양해지다 보니 곳곳이 지뢰밭이다. 대기업 홍보실에 근무하는 문 과장(36)은 메신저 때문에 낭패를 봤다. 어느날 퇴근 시간 무렵에 부장이 회의를 하겠다고 메신저로 통보해 왔다. 퇴근 준비하던 직원들은 짜증이 날 수밖에. 문 과장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후배에게 '정말 왕짜증'이라는 말을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나 수신처가 잘못됐다. 그 메시지는 후배 직원에게 간 것이 아니라 부장에게 전달됐다. 부장에게 곧바로 사죄의 메시지를 보냈지만,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장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야단을 맞으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침묵으로 일관하니 더 불안했다. 문 과장은 그 이후로 아무리 급해도 메신저를 이용할 때는 두세 번 수신인의 아이디를 확인하는 게 버릇이 됐다.

전자업체 직원인 정모 대리(32 · 여)는 휴대폰 문자 하나로 '듣보잡 대리'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얻었다. 어느날 팀장이 부서 직원들에게 단체로 문자를 보냈다. "내일 부서 회식인데 알고들 있나"라는 메시지였다. 정 대리는 무의식적으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것)인데요"라고 답신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정 대리 또래에서는 일반화된 용어이지만 팀장 세대는 아니었다. 팀장은 나중에 '듣보잡'의 뜻을 알고 노발대발했다. 그 일이 있은 뒤 팀장이 "우리 듣보잡 대리"라고 비아냥거려도 정 대리는 꾹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 진다

거래나 협상 등에서는 말 한번 잘못하면 경제적인 손실을 입기 십상이다. 자신의 인사고과가 깎이는 것은 물론이다. 대기업 영업팀에 근무하는 유모 과장(34)은 거래처와의 술자리에서 자기 무덤을 팠다. 술이 문제였다. 거래처 직원 중 대학 후배가 있었다. 취중에 그만 후배에게 좀 심하다 싶은 반말을 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거래처 사장은 비위가 뒤틀렸다. 더욱이 그 거래처는 유 과장 회사의 '영원한 갑(甲)'이었다. 그 사장은 유 과장의 회사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고 유 과장은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유 과장은 "하마터면 대형 거래처를 잃을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는 서모씨는 말실수 하나로 20억원을 날렸다. 거래 기업의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해당 기업의 이름을 잘못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경쟁사 이름을 들먹거렸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말짱 도루묵이 됐다. 그 회장은 버럭 화를 내고는 "어느 회사랑 일하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계약할 수 없다"며 판을 엎었다. 결국 서씨는 회사에서 근신 처분을 받아야 했다.

◆말 실수를 예방하려면

세 치 혀로 이익을 얻는 경우도 많다. 특히 궁지에서도 재치 있는 말 한마디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유윤상 대리(33)가 대표적인 케이스.유 대리는 최근 회사 워크숍 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다 막 도착한 회사 사장에게 발각됐다. 사장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유 대리를 바라봤다. 유 대리는 당황하지 않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워크숍 건물까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사장은 싹싹한 유 대리 모습에 땡땡이를 친 사실은 잊은 채 조용히 워크숍 장소로 이동했다.

이른바 '속사포'로 통하는 한 금융회사의 김윤성 과장(40).거침 없는 언변과 시원한 성격 덕에 선 · 후배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서먹한 술자리가 생기면 어김없이 '분위기 메이커'로 러브 콜을 받는다. '거국적'인 모임이 있을 때는 자주 사회자로 초빙되곤 한다. 내뱉는 말이 많다 보니 사내에 '안티'가 많을 법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김 과장은 '예스 맨'이 되면 절대 적이 생기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항상 사람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윈윈'의 비법이라는 얘기다. 김 과장은 "상대가 재미없는 말을 해도 웃어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버 액션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얼씨구 절씨구'하는 판소리 추임새로 거들어 주면 자연스레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인설/이관우/이정호/이상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