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허브의 알싸한 향과 기름진 풍미도 코에 감긴다. 카레 가루가 쌓여 있고 각종 조미료와 조리 기구들이 놓여 있다. 개수대에는 설거지 더미가 한아름 쌓여 있다. 여느 주방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비커와 깔대기,각종 측정기 등 연구 자재들이 갖춰져 있다. 한쪽에는 미생물을 채취하고 배양할 수 있도록 해 놨으며 칠판에는 연구 경과가 빼곡히 적혀 있다.

서울 구로동의 CJ제일제당 식품연구소 풍경이다. 이곳에서 대형마트나 슈퍼의 냉장 · 냉동 · 상온 식품 코너를 장식하는 다양한 가공식품들이 탄생한다. 가공식품을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식품연구원'의 몫이다. 이 연구소에서 일하는 문혜원 식품연구원(34)을 만났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팔을 걷어붙인 채로 나왔다. 뭔가 만들던 중이었는지 손에서 향신료 냄새가 풍겼다.

▼식품연구원으로 일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서울여대에서 식품영양학을,서울대에서 식품공학을 공부하고 1999년 입사했어요. 당시 함께 입사한 식품연구원이 3명이었는데 모두 석사 학위가 있었죠.현재 연구소엔 200여명의 식품연구원들이 있고 그 중 여성의 비율은 40% 정도 됩니다. 저는 원래 식품연구원에 뜻이 있었고 쭉 이쪽 공부를 해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식을 맛보고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친정 어머니가 손맛이 있는 편이시죠."

▼식품연구원은 어떤 일을 하나요.

"가공식품을 기획하고 개발합니다.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맡으면 담당 마케터와 상의해서 제품을 구상한 다음에 이를 음식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마음에 들면 이를 포뮬레이션(배합)해요. 살균,건조,냉동 등 공업화하는 단계를 거치는 겁니다. 주부 모니터 등에게 시식하게 한 뒤 합격점을 얻으면 생산에 들어갑니다. 전국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여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거죠."

▼음식으로 '표현'하는 과정이 힘들 것 같아요. 드라마 '대장금'에서 주인공 장금이가 음식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요리에 대한 영감을 얻어 머릿속으로 맛을 그리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단맛은 어느 정도 나야 하는지,향은 어떤 수준이 적정한지 이런 것들을 계량화,정량화하는 거예요. 조미료도 정말 다양하잖아요. 단맛을 내는 원료에는 설탕 외에도 과당과 물엿 등 많은 종류가 있거든요. 먹음직스럽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색상에도 신경을 씁니다. 신제품 개발을 시작하면 하루에 대여섯 번씩 요리해 봅니다. 야근도 잦죠.한 제품을 개발하는 데 평균 6개월쯤 걸리니까 800번 이상 음식을 만들었다가 뒤엎는 셈이에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내 · 외부 평가에서 3.8점(5점 만점) 이상을 받아야 제품화가 가능해집니다. "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겠어요.

"재미있는 얘기 해드릴까요? 저희 식품연구원들은 감기에 걸리면 절대 안 됩니다. 코가 막히거나 약을 먹으면 혀가 둔해져서 맛을 감지하는 게 힘들어지거든요. 그럴 때면 울고 싶죠.그래서 늘 몸관리에 신경씁니다. "

▼여태까지 어떤 가공식품을 만들었습니까.

"'런치팝 스파게티'와 각종 레토르트 식품,'프레시안 냉장수프',김치찌개와 부대찌개 등 한식 제품,'인델리 카레'가 제 손을 거쳤어요. 지난해 5월 출시된 인델리 카레는 지금까지 370만개가 팔릴 정도로 소비자 반응이 좋아요. 얼마 전에는 플레이크(얇은 조각) 형태의 '인델리 소프트 분말카레'를 추가로 출시했죠.파니르(고소한 맛),빈달루(매콤한 맛),마크니(달콤한 맛) 등 맛을 다양화했고요. "

▼식품연구원보다 더 정확한 미각과 입맛을 자랑하는 소비자도 있을 법 한데요.

"맞아요. 프레시안 냉장수프를 출시한 뒤에 한 소비자가 '수프에서 철수세미 맛이 난다'며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어요. 처음엔 속으로 무시했어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죠.그런데 유사한 불만사항이 계속 접수되는 거예요. 결국 연구원들이 모두 모여 일일이 테스트를 해 보다가 허브를 공급하는 한 업체가 향신료의 원산지를 슬쩍 바꿨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향신료의 비중은 0.05%로 정말 작은 원료였죠.사실 허브를 재배하는 토양이 바뀌게 되면 그 향도 함께 변하거든요. 깜짝 놀랐죠.그 사건 이후엔 소비자들의 입맛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됐습니다. 많이 반성했죠."

▼제품을 출시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소비자와 시장 반응을 꾸준히 체크하며 후속작업을 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소비자들의 입맛은 조금씩 변하더라고요. 2000년에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출시하려고 주부 테스터를 불러 시식하게 했는데 반응이 참담했습니다. '역겨워서 못 먹겠다''이것도 음식이냐' 등 악평이 쏟아졌고 결국 시장에 내놓는 걸 포기했죠.얼마 전에야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출시했어요. 수 년이 걸린 셈이죠.11년째 식품연구원으로 일하다 보니 사람들의 입맛이 점점 싱겁게,달지 않게 변한다는 걸 느껴요. 하나를 사 먹더라도 건강을 꼼꼼히 따지는 분위기로 바뀌었고요. 제품 출시 이후에도 염분과 당도 등의 맛과 원료를 체크해 반영하고 있습니다. "

▼입맛 까다로운 식품연구원들이 모여 있으면 해프닝도 많을 법 합니다.

"우리끼리 회식하러 가면 진풍경이 벌어져요. 음식점에서 찌개나 전골류,술안주 등을 시켰는데 맛이 없으면 주방에 직접 주문을 해요. 마늘,간장,설탕 등 조미료를 갖다 달라고 해서 저희가 즉석에서 다시 조리하기도 합니다. 피곤한 손님들이죠.주말에 남편과 아주 유명한 식당에 곰치국을 먹으러 갔어요. 남편은 맛있게 먹었는데 전 국물에서 가쓰오부시 맛이 느껴지더라고요. 국물의 조화가 안 맞는다고 얘기했더니 남편이 '왜이리 까다롭냐'며 타박하더군요. 갓 입사한 식품연구원들 중엔 급격히 살이 찌는 분들이 있어요. 다른 팀에서 만드는 햇반,찌개,국,간식거리 등 연구소에 먹을 게 넘쳐나거든요. 사방팔방에 음식이 가득한 곳이니까요. 그러다 점점 불어나는 몸무게를 보며 정신을 차리게 되죠.사실 저희가 만든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건 아니에요. 맛만 보고 뱉어요. 그리고 찬물로 입을 헹구거나 식빵을 먹어 입속을 비우죠."

▼식품안전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이겠어요.

"모든 식품첨가물이 다 유해한 건 아닙니다. 천연 재료도 많고요. 요즘 추세가 좋은 원재료를 쓰는 분위기이거든요. 멜라민 파동 등 관련 이슈가 터지면 저희는 비상 체제죠.저희 회사는 아예 식품안전센터를 연구소에서 분리했습니다. 현행 식품 관련 행정법규보다 더 엄격하게 자체 관리를 하고 있어요. 제 딸아이가 다섯 살인데 제가 만든 제품을 아이에게도 먹이거든요. 내 가족과 내 친구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업무에 임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식품연구원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

▼좋아하는 음식과 앞으로 꼭 만들어보고 싶은 제품은.

"전 한식이 좋아요. 남편은 제가 만든 김치찌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하죠.요즘엔 술안주로 '오징어 보쌈김치'를 해먹습니다. 오징어와 미나리를 살짝 데쳐 채썰고 초고추장과 참기름 등으로 양념을 해서 버무려요. 배추김치의 양념을 적당히 턴 다음 이들을 돌돌 말면 끝내주는 술안주가 됩니다. 요즘 한식의 세계화가 이슈인데 제가 만든 한식 제품을 전 세계에 팔고 싶어요. 사실 한식만큼 어려운 음식이 없더라고요. 가정에서 누구나 다 먹기 때문에 한식 요리에 대한 맛의 기준이 제각각이거든요. 무엇보다도 제 손을 거친 제품을 맛본 소비자들이 '맛있다'는 말 한마디만 해 준다면 저는 그걸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맛있다'는 말은 식품연구원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최고의 찬사이거든요. "

글=김정은/사진=허문찬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