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가림만 급급한 상사,하루가 다르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비전이 보이지 않는 회사.직장 내 자신의 존재감이 희미해져갈 때 누구나 한번쯤 사표를 떠올린다.

재수 없는 상사의 면전에 보기 좋게 사표를 날리고 위풍당당하게 회사 문을 차고 나가는 모습.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머릿속으로는 골백번도 사표를 써보지만,막상 사표를 내려면 처자식부터 눈앞에 어른거린다. 솔직히 뛰쳐나가 더 잘할 자신도 없다. 결국 가슴에만 '꽁'하니 사표를 묻어두고 오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게 김 과장,이 대리들이다.

◆면피형 상사와 쥐꼬리 보수 때문에

일만 들입다 시키고 책임질 일에서는 쏙 빠져버리는 상사.이런 모습을 볼 때 일을 저지르고 싶은 건 직장인들의 인지상정이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손형식 과장(38).그는 어느 날 팀장의 일까지 맡아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돌아온 것은 마케팅 본부장의 호통뿐.팀장이 본부장의 지시 사항을 잘못 이해한 채 그릇된 업무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살짝 빠졌다. 책임을 모두 뒤집어쓴 손 과장은 본부장의 벌개진 얼굴에 대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했다.

은행에 다니는 양모 과장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양 과장은 얼마 전 직속 상사인 부장으로부터 부당한 대출 압력을 받았다. 담보도 부족하고 사업성도 없는 중소기업에 50억원을 무조건 대출해 주라는 지시였다. 알고 보니 그 중소기업 대표는 부장의 대학 선배였다. 부장은 그 사실을 숨긴 채 "은행의 방침상 중소기업 대출을 늘려야 하니 돈을 빌려줘야 한다"며 책임은 무조건 부장 본인이 지겠다고 했다. 양 과장은 "규정상 절대 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인사 고과 때 보자"는 협박 때문에 끝내 그 기업에 대출을 해주고 말았다.

최근 실시된 감사에서 그 대출이 문제가 됐다. 그러자 그 부장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대출 실무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일주일간의 감사 끝에 다행히 양 과장의 결백함은 밝혀졌지만 양 과장은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며 사표를 몇 번이고 던지고 싶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보상도 직장인들에게 사표를 떠올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업무 능력을 의심받거나 인간적 모멸감을 느낄 때도 사표가 당긴다.

◆사표는 최후의 복수

사표는 은장도와 비슷하다. 힘없는 말단 과장 대리로서 절대권력인 상사와 회사에 '자결'이라는 방법으로 대항할 수 있는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은장도가 자신이 아닌 상사를 향할 수 있다.

제약사 영업사원 K씨가 그런 케이스다. 그는 3년 전 모두가 '꽃보직'이라며 부러워하던 공기업 연구원직을 때려 치웠다. 형식적인 일만 하고 승진이 힘든 점이 갑갑했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바로 직속 상사였다. 툭하면 육두문자였다. 술자리에서 귀를 잡아당기거나 한팔로 목을 조르는 주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상사는 승진에선 늘 앞서갔다. 윗사람한테는 항상 '옛 써(Yes,sir)'만 외치며 일을 재빨리 해치우는 유능한 부하였기 때문이다.

사표를 쓴 직접적인 이유는 시도 때도 없는 공개비판 때문.프레젠테이션 때 쓴 사소한 영어 단어 철자를 트집 잡은 적도 있었다. 그 상사는 "그러니까 당신이 곰바우라는거야.대학은 어떻게 나왔냐?"며 인격적 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사표를 내는 날도 그랬다. "평소 기본도 안돼 먹은 게 사표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도 구분하지 못하고,지금 회사 전체가 바빠 죽겠는데 사표 낼 때야? 하여튼 넌 조직에 도움이 안돼." 이 같은 면박을 주고 사표도 수리하지 않았다. K씨의 마지막 선택은 복수였다. 회사를 떠나면서 그 상사의 비위 사실을 갖고 나왔다. 그 상사는 지방 출장 때마다 영수증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출장 비용을 부풀렸다. K씨는 감사실에 익명으로 상사의 비위 사실을 제보했다. K씨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욱'하고 낸 사표는 부메랑

입사보다 퇴사가 어렵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회사가 맘에 들지 않아 나간다 해도 직장 동료들과 등을 돌리는 건 뭔가 찜찜하다. 이런 우를 범하지 않고 좋게 헤어지려다 결국 만류하는 선 · 후배들 정에 이끌려 사표를 물리고 눌러앉는 게 다반사다. 사표 쓰는 게 이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얘기도 나온다.

반대로 인간관계 방정식을 무시하고 앞만 보고 사표를 던지면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치받고 사표 쓰는 것은 자살골이나 다름없다. '커리어(경력)나 돈에 환장한 놈'이라는 주홍글씨를 남길 수도 있다.

사표는 타이밍이 절반이다. 아무리 명분이 있는 사표라 해도 때를 못 맞추면 빛이 바래기 일쑤다. 원수지간이었던 상사로부터 역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품회사 한모 대리(32)는 마음이 여린 탓에 몇 달간 '사표를 낼까 말까'로 속앓이를 했다. 견디다 못해 사표를 제출했는데 하필 그 날이 새 사업과 관련해 업무분장을 끝낸 때였다.

한 대리의 사표를 받은 팀장은 전화기를 집어던지며 노발대발했다. "나가려면 업무분장 전에 나가야지.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지금 사표 낸 거야"라며 막말까지 해댔다. 한 대리는 "사표 내기 전까지만 해도 응원해주던 동료들까지 싸늘해지더라"며 "이직을 결심하면 치밀하게 준비하고 바쁜 일이 해소된 이후에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사표의 기술

사표를 쓸지 말지 고민이 되는 단계라면 술김을 빌려 선배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며 운을 떼 보는 게 순서다. 그렇지 않으면 제3자를 통해 "사표를 쓸 것 같다"는 분위기를 인사권자에게 흘리는 것도 효과적이다. 이때 사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단 사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명분을 잘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아프다"거나 "보증을 잘못 섰다" "주식 때문에 빚을 졌다" 같은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잘 먹히는 편이다.

이직을 위해 사표를 다섯 번 이상 써봤다는 홍보대행사의 배모 이사(39 · 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항상 박수칠 때 떠나라"고 강조한다. 나름대로 본인의 주가가 정점일 때 나가라는 얘기다. 그리고 나가게 될 때는 "그동안 많이 배웠다"거나 "나중에 꼭 돌아오겠다"는 멘트를 남기는 게 도리다. "회사 조직이 맘에 안 들었다"거나 "상사가 싫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항상 뒤끝은 없어야 하는 법이다.

정인설/이관우/이정호/이상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