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회 vs 성숙한 사회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인문학 산책] 17C 러시아서 '가짜 황제'가 판친 이유는

니콜라이 고골의 유명한 희곡 '검찰관'은 사기꾼에 관한 드라마다.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날린 주인공은 어느 마을의 싸구려 여관에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그 마을의 부패한 관리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검찰관이라고 생각하여 온갖 뇌물을 다 갖다 바치며 아부를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검찰관을 사칭하게 된 주인공은 챙길 수 있는 것은 다 챙긴 다음 줄행랑을 친다.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날아들고 마을의 관리들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러시아 역사에는 이런 식의 사칭뿐 아니라 이보다 한 수 위의 '고급' 사칭 또한 빈번히 벌어진다. 사기꾼이 자신을 그냥 고위 관리가 아닌,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 즉 황제라 부를 때 우리는 사칭 대신 참칭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러시아는 세계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참칭자를 배출했다.

러시아 참칭을 대표하는 인물은 17세기 초에 활약했던 '가짜 드미트리'다. 황제 이반 4세가 서거하자 그의 장남인 표도르가 권좌를 물려받았다. 불행하게도 그는 국사를 돌보기 어려울 정도로 병약하고 소심했다. 그래서 지략과 야망을 겸비한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가 그를 대신해서 권력을 휘둘렀다. 보리스는 자신의 앞날에 장애가 될 것처럼 여겨졌던 선제의 차남 드미트리 황태자를 살해하고 병약한 장남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표도르가 죽자 보리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돌연 스스로를 자객의 칼을 피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황태자 드미트리라 부르는 청년이 등장했다. 이 청년은 물론 가짜 황태자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도망친 수도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청년은 무수한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고 거기에다 폴란드 왕의 지원까지 받아 한동안 진짜 행세를 하며 러시아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참칭으로 인해 촉발된 대혼란은 가짜 드미트리가 처형당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제2, 제3의 가짜 드미트리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황태자'를 자처하며 줄지어 등장했고 그때마다 러시아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역사가의 통계에 따르면 17세기에만 적어도 14명의 꽤 그럴듯해 보이는 참칭자가 등장했다고 한다.

참칭의 역사는 이후로도 길게 이어진다. 18세기에 나타난 수십명의 참칭자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농민 봉기의 선봉장인 푸가초프였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막강한 여제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 그는 폐위시킨 남편을 아예 살해하여 후환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푸가초프라는 이름의 탈영병 농부가 자기야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표트르 3세라고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얼핏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여제의 군대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무려 3년 동안 러시아 땅을 피로 물들인 푸가초프의 봉기는 결국 푸가초프가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얼마 후 또 다른 자칭 황제가 등장했고 이번에도 또 사람들이 떼지어 그의 뒤를 따랐다. 러시아 참칭의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점은 참칭자의 심리도 아니고 타고난 사기 기술이나 화술이나 배짱 같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심리다. 예컨대 푸가초프 같은 일자무식 농부가 황제를 사칭하는데 사람들이 그걸 믿은 이유는 푸가초프의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참칭자는 언제나 민생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출현했다는 점이다.

'검찰관'의 주인공이 부패한 관리들 덕분에 사칭에 성공할 수 있었듯이 참칭자들은 대기근, 외세의 침략, 정쟁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나타났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해줄 '진짜' 황제가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황제를 참칭할 때 즉각적인 호응을 보냈다. 그가 가짜로 밝혀져 제거된 후에도 '진짜 황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제2의 가짜가 나타나면 또다시 민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백성들에게 참칭자가 진짜임을 뒷받침해줄 증거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고 싶기 때문에 믿었다.

오늘날 황제를 참칭하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제보다도 더 높은 신을 참칭하는 인간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사이비 교단의 교주들은 그 좋은 예다. 그들은 환생한 성자는 물론이거니와,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까지 사칭하며 피곤에 지친 대중의 심리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인문학 산책] 17C 러시아서 '가짜 황제'가 판친 이유는


오늘날 인류 구원을 모토로 내세우는 가짜 메시아들은 가짜 황제들보다 더 기적적인 이야기로 무장을 하고서 대중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들은 고위 관리나 황제를 사칭하는 사람들보다 그 모습이 훨씬 다양하고 교묘하며 그래서 훨씬 더 위험하다. 사이비 교단의 교주,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영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는 미친 과학자,스스로 도덕률을 초월한다고 믿는 연쇄살인범,그리고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사이버라는 가상의 공간을 악용하여 거짓 정보를 마구잡이로 흘리는 부류 등등은 모두 가짜 구세주들이다. 가짜 황제가 그랬듯이 가짜 구세주들도 사회가 불안할수록 더욱 극성을 부린다. 그리고 가짜 구세주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보통 사람들이다. 성숙하고 안정된 사회만이 이런 가짜들을 물리칠 수 있다.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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