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엽 < 서울대 미학과 교수 >

낭만주의 예술은 18세기 독일에서 비롯돼 서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성적 사유를 강조하는 계몽주의에 반발해 낭만주의는 질풍노도의 감정을 강조한다. 그리고 질풍노도의 감정에 꿈,환상,무한,불가해 등이 덧붙여지면서 낭만주의 예술은 지금 이곳을 훌쩍 넘어선다.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 중 하나인 키츠는 "불면의 밤을 보내며 써서 완성한 시를 아침의 떠오른 해를 바라보며 불태워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힘들여 공들여 완성한 시를 아침에 불태워도 좋을까. 왜 분서를 자초하는 것일까. 그 까닭을 낭만주의 예술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영국의 사상가 콜링우드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어보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토론이 이어진다. 숙취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입을 열지 않자 상사의 질문이 나에게 향한다. "이번 사업 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우물쭈물거리며 몇 마디 던진다. 상사의 양미간이 찌푸려진다. 아이쿠.회의 끝날 때까지 좌불안석이다.

"다음에 다시 논의하겠습니다"는 상사의 말이 가슴을 짓누른다. 내 자리로 돌아와 백지를 책상 위에 놓는다. 회의 주제를 백지 위에 적는다.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내 입장을 적어본다. 내 입장의 근거도 열거해본다. 내 입장에 대한 반론은 어떤 것이 가능할지도 적어 나간다. 백지 위에 글자들이 이어지고,내 생각도 그에 발맞춰 정리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을 말하라고 할 때 즉흥적으로 대답했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이나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은 염주 알처럼 알콩달콩 진행되기 때문에 백지를 펼쳐놓고 차근차근 적어 나가야 정리가 된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나가기는 힘들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이나 훈련이 필요하듯 감정을 정리하는 연습이나 훈련도 필요하다. 즉흥적으로 생각을 표현했다가 후회막급에 이르듯이,불쑥 화를 냈다가 낭패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감정을 정리하는 훈련이나 연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백지를 펼쳐 놓고 분노나 슬픔을 정리해 나갈 수는 없다. 분노나 슬픔은 염주 알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생각과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분노나 슬픔은 불쑥 치솟기도 하고,스멀스멀 밀려오기도 하고,욱 폭발하기도 한다. 때론 용솟음치고,때론 흐느끼고,때론 쿵 한다. 이런 생김새의 감정을 백지 위에 염주 알처럼 정리하려고 하면,그 백지는 찢겨지거나 구겨지거나 구멍 나기 십상이다. 콜링우드에 따르면 감정에게는 그에 걸맞은 생김새의 정리 방식이 있어야 한다.

용솟음치고,흐느끼고,쿵 하는 감정에는 예술적 언어가 적격이다. 거침없이 용솟음치는 붓질,처연히 흐느끼는 선율,격렬히 쿵 하는 춤사위 등이 감정을 정리하는 데 제격인 것이다.

"당신은 아주 감정적이에요"는 말과 "당신은 참 이성적이에요"는 말 중에 우리는 어떤 말을 듣기 좋아할까.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의 말에 썩 기분 좋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정적이라는 말 속에는 즉흥적이고,무질서하고,종잡을 수 없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뉘앙스는 감정을 이성의 잣대로 측량하고 정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염주 알처럼 생긴 이성의 잣대로 울퉁불퉁한 감정을 정리하려다 보면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엇박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감정을 그에 걸맞은 잣대인 예술로 정리하게 되면 나름의 질서와 조화가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명작과 명곡과 명화들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조화로운 형식 속에 담아내며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가.

그런데 감정을 정리하는 장으로서 예술이 훌륭히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의 산물인 예술 작품을 불태워도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백지 위에 일련의 생각들을 적어나가며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마쳤다고 하자.일단 정리됐으면 백지를 구겨버린다고 해서 이미 정리된 생각이 구겨지거나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정리이지 백지의 보존이나 전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술의 경우에도 콜링우드는 예술의 본령을 감정의 정리에 두었다. 감정의 정리라는 목적을 달성했으면 예술 작품은 그 임무를 훌륭히 완성한 것이다. 물론 힘들여 완성한 작품이 보존되고 전시되면 좋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불태워도 좋다"는 극단적 표현에는 감정의 정리보다 유형의 결과를 더 중시하고,심지어 숭상하는 본말전도의 현상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삶의 고달픔을 교향곡 운명의 선율을 통해 정리하고 승화해 나갔으며,청마 유치환은 사랑의 애절함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하며 곰삭여 나갔다. 운명이 고단하고 사랑이 애달플 때,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시를 읊으며 파도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을 내 마음으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