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내린 와인의 정의는 '포도껍질의 파쇄와는 상관 없이 오로지 신선한 포도나 포도즙을 일부 또는 완전한 알코올 발효 과정을 거쳐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신선한 포도'라는 문구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이 정의에 의하면 언 포도로 만든 아이스 와인은 와인이 아니며,세계적으로 유명한 '소테른' 같이 귀부병(貴腐病)에 걸려 전혀 신선하지 않은 포도알들을 골라 만든 스위트 와인도 와인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당도와 향을 강화하려고 의도적으로 말린 포도를 사용한 이탈리아의 아마로네도 와인이라 하기에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뚱맞은 문구가 추가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2000년이 넘는 프랑스 와인역사에 큰 피해와 충격을 준 사건은 수없이 많다. 13세기와 19세기 사이 영국과 벌인 100년 전쟁,스페인 왕위계승 전쟁,나폴레옹 전쟁 등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으로 보르도 와인은 최대 시장인 영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혀 생산량 조절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1340년대 후반 유럽에 창궐해 인구의 30% 이상을 감소시킨 흑사병은 와인 생산은 물론 소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917년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프랑스 고급 샴페인의 최대 고객인 러시아 황실과 귀족계급을 한 순간에 몰락시켰고,1920년 미국에 내려진 금주령으로 인해 북미지역으로의 판로도 막혔다. 이어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은 북미뿐 아니라 유럽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어 고급 와인의 소비가 급감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계 60개국에서 73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2차 세계대전은 부르고뉴,샹파뉴 지방을 비롯한 많은 포도밭을 전쟁터로 만들어 황폐화시켰다. 특히 건장한 남성들이 대부분 참전한 까닭에 노동력 부족으로 수확량도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프랑스 와인산업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은 크기 1㎜도 안 되는 '필록세라(phylloxera)'의 소리 없는 공습이다. 포도나무뿌리혹벌레로도 불리는 노란 진딧물의 피해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학자들은 유럽의 와인역사를 필록세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이 해충은 19세기 중엽 미국 동부에서 유럽으로 전해졌으며,25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프랑스의 와인 생산량을 60% 이상 감소시켰고 이탈리아,스페인,독일의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유럽은 물론 멀리 캘리포니아,호주,뉴질랜드까지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르고 피해가 극심해 자칫 지구에서 모든 포도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 해충은 포도나무 뿌리에 붙어살면서 수액을 빨아 먹어 뿌리에 혹이 생기고 잎은 누렇게 변하며 결국엔 포도나무를 죽게 만든다. 수컷의 도움 없이도 산란하는 단위생식 종으로 1년에 7~10번 세대생식을 해 이론적으로는 한 마리가 한 해에 256억마리의 성충을 생산한다. 더구나 각종 살충제와 방제법에도 쉽게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진딧물에 저항력이 있는 미국산 포도나무의 뿌리 위에 유럽 품종을 접목시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실제로 1900년 프랑스에서 재배된 포도나무의 3분의 2 이상이 미국산 뿌리 위에 접붙인 것이다. 그러나 와인 생산량은 과거 수준을 회복하는 데 무려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필록세라의 단기적 후유증으로 관리가 잘 된 와인들은 가격이 치솟고,소비자들은 저렴한 맥주나 증류주 등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와인 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무역상들은 다른 나라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와인에 프랑스 와인을 섞어 질 낮은 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때 식민지인 알제리와 북부 아프리카의 경우 포도 재배면적이 거의 20배로 늘었으며,남아프리카의 와인산업도 부흥기를 맞았다. 또한 건포도로 만든 와인 생산도 대규모로 이뤄졌다. 와인을 만들 포도를 확보하지 못한 와이너리들은 수입된 건포도를 물에 넣고 발효시킨 도수 낮은 와인에 값싼 남부 와인들을 섞어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으로 속여 팔았다. 위조된 와인의 생산량은 점차 늘어 1890년에는 전체 와인 생산량의 10%가 넘었으며 필록세라의 피해가 진정된 뒤에도 줄지 않았다.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와인 매매를 관리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위조 와인을 단속하는 기구도 발족시켰다. 1907년 9월 '와인은 신선한 포도나 포도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규정하는 조항이 신설되고,공급 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군대에도 와인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 sowhatcho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