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종교계.의료계 "제도화 서둘러야"

세브란스병원이 법원과 가족의 결정에 따라 23일 김모(77) 할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한 데 대해 의료계와 생명윤리계, 종교계는 사전 의사표명에 따른 '존엄사'에 대한 제도화 필요성을 밝히면서도 남용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최경석 교수(법학과)는 이날 "말기 상태에서 치료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경제적 부담을 의식한 강요된 치료중단 동의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최 교수는 또 "이번 판결은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시행되고 있는 무의미한 기계적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한 것인데 '존엄사'라고 표현하면 자칫 광범위하게 '존엄하게 죽을 권리'로 해석돼 생명 경시풍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북미 지역에서 '존엄사'(Dying with dignity)는 말기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 즉 '의사 조력 자살'을 뜻한다.

가톨릭대 생명대학원 구인회 교수(생명윤리 전공)는 "환자가 생전에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았다는 추정을 법원이 받아들였는데 자칫 남용 우려가 큰 부분"이라며 "가족이나 보호자의 뜻이 '환자의 뜻'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호자들이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환자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이번 판례를 근거로 의료진이 그러한 보호자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이에 따라 개별 의료기관 차원의 지침이 아니라 법적 제도가 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 좌훈정 대변인은 "의료계와 사회 각계층의 합의가 담긴 지침을 만들고 이 지침이 현재 진행 중인 입법에 반영돼야 한다"며 "각 병원이 지침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법제화가 돼야 의료 현장에 적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협은 최근 연명치료중단 관련 지침 마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이날 첫회의를 개최해 앞으로 계획을 논의했다.

특별위원회는 8월말 지침안에 대한 여론수렴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해 의료계의 최종안을 도출한 후 국회에 이를 전달할 계획이다.

종교계 일각에서는 그러나 이른 제도화.법제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드러냈다.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총무인 이동익 신부는 "대법원의 이 판결은 어디까지나 김할머니의 경우에만 국한된 판결이었다"고 강조하면서 "그런데도 판결 이후 병원들이 실천지침을 만드는 과정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도 지난 2일 존엄사법 제정은 시기상조라는 내용을 담은 강론자료를 이달 각 본당에 배포한 바 있다.

구인회 가톨릭대 교수도 "건강보험 제도 등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적 요건이 정해진다면 치료 중단이 일반화되고 생명경시로 이어질까 걱정된다"며 성급한 제도화를 경계했다.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tr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