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파 배우에서 주연보다 눈부신 조연까지

지난 3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한 도금봉(본명 정옥순)씨는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의 관능파 여배우로 불린다.

1933년 인천 출생으로 여고를 졸업 후 악극단 '창공'에서 '지일화'라는 예명으로 이름을 떨치다 1957년 '황진이'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조긍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에서 고인은 요부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세기의 요우(妖優)'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명 도금봉은 영화계 데뷔 당시 황진이가 살았던 개성의 옛 이름인 송도의 도(都), 황진이가 즐긴 가야금의 금(琴), 그리고 영화계의 봉우리가 되라는 뜻의 봉(峰)을 한자씩 따 지은 것이다.

또 고인은 한국 최초의 공포영화라는 평도 받는 이용민 감독의 1965년작 '살인마'에서 악녀 역할을 했고 이후 악녀 이미지가 추가됐다.

이듬해 '목없는 미녀', '월하의 공동묘지'(1967), '백골령의 마검'(1969) 등 공포 영화에 잇따라 출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육체파 배우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유관순'(1959) 등의 역할도 소화, 영화배우 활동 초기부터 연기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1960-1970년대에는 정상급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은 '새댁'으로 제2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1963), '작은 꿈이 꽃필 때'로 제1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2), '토지'로 제1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1974) 등을 수상했다.

특히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씨 등과 함께 활동한 60년대에는 주로 조연을 맡으면서도 넘치는 카리스마로 주연 못지않은 조연이라는 평을 들으며 주목받았다.

고인은 '황진이'이후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0년대까지 TV 드라마에서 활동하다 1997년 전당포 노파로 분한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를 끝으로 40년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했다.

남성들과의 염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던 고인은 선정적인 뉴스나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맞서 당당한 여배우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시키기도 했다.

고인은 은퇴 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복집을 운영하며 두 아들과 평탄하게 살았으나 10여년전 사업을 정리한 뒤에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왔다.

지난 3일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타계했지만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고인의 유언으로 별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동국대 영화영상학과의 정재형 교수는 "여장부 같은 인상을 지녔고, 악역도 많이 했지만 강인하고 정의로운 역할도 했다.

한마디로 연기의 폭이 매우 넓었던 훌륭한 배우"라고 회고하면서 "조연을 많이 했던 연기자지만 본인이 워낙 카리스마가 강해 주연보다 인상적인 조연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