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못하는 설움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기러기 아빠를 자처한 김 과장.아내와 자녀를 캐나다로 보낸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그로기 상태다. 10년 만에 해 보는 독방살이는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듯 지독한 외로움의 연속이다.

올해 초 승진 필수 코스인 지방 근무를 신청한 이 대리.결혼 3년 만에 시작한 주말 부부의 삶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주말마다 만나니 애틋한 건 좋다. 그렇지만 낯가림을 시작한 두 살배기 아기에게 아빠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족과 생이별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과거처럼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생이별이 아니다. 자녀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기러기 아빠나 주말 부부를 자처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이들은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행복'이라는 모토를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하루 하루는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집은 그저 잠자는 곳일 뿐이다

A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유 과장(37)은 매일 아침 6시에 집을 나선다. 석 달 전 열 살배기 아들과 아내를 중국으로 조기 유학 보낸 뒤 생긴 습관이다. 그가 '새벽형 인간'이 된 건 먹고 사는 문제 때문.끼니를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 하루 세 끼를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는 회사 구내 식당을 즐겨 애용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침 식사를 같이할 수 있는 회사 동료들이 적지 않아서다. 유 과장은 "예전에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같이 밥먹어 주는 이들이 제일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없는 탓에 유 과장의 귀가는 자연스레 늦어진다. 방에 불을 켠 뒤 TV도 보고 책도 읽어 보지만 사람 냄새만 못하다. 그러다 보니 가능한 한 늦게 귀가하려 한다. 기분 좋을 만큼 술을 마시거나 늦게까지 야근을 한 뒤 집에 들어와 숙면을 취할 때가 유 과장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취미 생활은 접은 지 오래다

2년째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는 대기업 D사의 김 과장(40).매달 세금을 떼고 50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지만 생활은 비참할 정도다. 생활비 80만원 정도만 남기고 미국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취미 생활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퇴근 후 부하 직원들도 슬슬 피하고 있다. 혹시라도 술값을 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게 겁이 나서다. 집에 들어와 라면에 소주를 먹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낙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해 가족이 있는 해외로 자주 나갈 수 있는 '독수리 아빠'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저 1년에 한 차례 겨우 다녀올 뿐이다. 물론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어 가족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펭귄 아빠'보다는 낫다. 그렇지만 아무리 아껴 써도 미국에선 항상 생활비가 부족하다는 'SOS' 신호만 보내오니 미칠 지경이다. 그나마 요즘 원 · 달러 환율이 떨어진 게 위안이다. 아이들이 미국으로 간 지 2년 만에 영어도 잘하고 성적도 좋아 다행이지만 환율이 다시 치솟으면 옴쭉달싹 못할 처지다.

◆야근보다 주말이 무섭다

증권사에 다니는 권 과장(39)은 3년 전 아내와 아이들을 캐나다 토론토로 보냈다. 가족 모두 이민을 가려 했지만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그 혼자만 한국에 남았다. 그에겐 주말이 두렵다. 너무 길고 지루하다.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어 고등학교 동창들을 불러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소일하는 게 주말 일과의 전부가 됐다. 권 과장은 "가족들이 떠난 뒤 평범한 주말을 보내는 게 가장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나마 토요일 밤 1시간 정도가 일주일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캐나다 시간으로 일요일 오전이 되는 이때 비로소 인터넷 전화로 아이들과 마음놓고 수다를 떨 수 있기 때문이다. 통신사만 같으면 통화료가 공짜인 인터넷 전화가 그에게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셈이다. 그는 "아이들 방학을 기다리는 재미로 살고 있다"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생활"이라고 말했다.

◆열심히 일하지만 변동이 심하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윤 과장(41)은 작년 초 기러기가 된 이후 일 욕심이 많아졌다. 가족이 떠나간 허전함을 일로 채우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짬만 나면 회사 동료들의 도우미를 자청하며 거들어 준다. 시간 걸리는 일이 있으면 자진해서 손을 든다. 집에 일거리를 갖고 가는 것도 즐겨 한다.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업무 집중력도 자연스레 좋아졌다. 직장 동료들도 "윤 과장이 적극적으로 변했다"며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문제는 업무 집중력이 출렁인다는 점이다. 범인은 환율이다. 조금이라도 환율이 낮을 때 돈을 부쳐야 하기에 시간만 나면 환율 시세를 쳐다보게 된다. 환율이 급등한 작년 말에는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러기 직장인들의 면모가 확실히 드러나는 때는 일과 후다. 부 회식이 있으면 모두들 일찍 들어가고 싶어하지만 기러기들은 예외다. 회식 자리를 질질 끌고 후배들을 꼭 집에 데려가려 한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직원들은 대부분 기복이 심한 편"이라며 "결국 기러기로서 성공하는지 여부는 자기관리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주말마다 숙제 검사를 받는다

기러기 직장인들에 비해 나은 편인 주말부부 직장인들에게도 애환은 있다. 군인인 남편과 떨어져 사는 직장인 유모씨(여 · 37)는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 남편이 올라오면 오히려 불편하다"며 "남편을 손님처럼 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유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남편의 취조하는 듯한 태도다. 유씨는 "주말마다 남편이 올라와서 숙제 검사하듯 '주중에 누구를 만났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며 "관심의 수준을 벗어나 의심의 단계로 넘어선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주말 부부들에게도 좋은 점은 있다. 2년간 구미에서 파견 근무를 하게 된 서모씨(36)는 "결혼 생활이 지루해질 무렵 헤어져 살게 돼 오히려 서로 애틋해지고 빈 자리를 확인하게 됐다"며 "그동안 쑥스러워 부르지 않던 '예쁜이' 등 닭살스런 애칭을 부르며 신혼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딘가에 미쳐야 한다

성공적으로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인들은 무엇인가에 빠져 있다. 어딘가에 몰두해 있으면 돈 문제보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이길 수 있어서다. 이들이 선호하는 건 사람 냄새 나는 활동이다. 대기업 S사에 다니는 기러기 아빠 조범현 차장은 올초 회사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했다. 지난달에는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 완주를 했다. 조 차장이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건강 때문이다. 식사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한 데다 술자리가 많아지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동료의 권유로 가입한 마라톤 동호회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기러기 아빠들이 4명이나 있다. 그들과 같이 이야기하고 운동을 함께하며 애환을 나누고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인 나모 과장은 '기러기 폐인'이 되지 않기 위해 수험생 모드를 택했다. 2년 뒤 아내가 돌아오기 전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을 취득하겠다는 목표를 잡고 주말마다 학원에 나가고 있다.

정인설/이관우/이정호/이상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