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버겔먼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영전략 분야의 대가다. 그의 수많은 연구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실리콘벨리의 전설적 기업인 인텔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이다. 1968년 설립된 인텔은 대규모 집적회로 메모리 제품의 디자인과 제조에 특화해 처음으로 성공한 기업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인텔은 1980년대 중반 NEC,도시바,후지쓰 등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공격에 견디지 못했다. 끝내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업으로 변신했다. 1998년 이후 인텔은 신경제에 대응해 다시 한번 인터넷 기반 구축 기업으로 변신을 모색했다.

버겔먼 교수가 앤디 그로브의 협조 아래 진행한 12년 연구의 결실이 바로 이 책에 담겨있다. 대학 교수가 오랜 기간 특정 기업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것은 여간해서 갖기 힘든 기회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협조 덕분에 독자들은 인텔 내부에서 벌어진 전략 수립과 실행 과정에서의 깊은 속사정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저자의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비범한 최고경영진이 탁월한 전략을 통해 기업을 변신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전통적인 전략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관점이다. 바깥에서는 인텔의 변신을 흔히 앤디 그로브라는 뛰어난 경영자가 냉철한 판단과 선택을 통해 메모리에서 철수를 결정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사업을 전환시킨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론 일부 중간 경영자들이 공식적인 전략 수립 이전에 이미 메모리 사업의 쇠락을 판단하고 자원을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에 투자하고 있었다. 오히려 고든 무어나 앤디 그로브 같은 최고경영진들이 핵심 기술의 보호 등 명분 때문에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를 늦추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연구 결과는 최고경영진이 반드시 전략의 주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기업은 특정한 전략적 선택을 통해 성공할 수 있지만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기존의 성공 요인이 성장의 원동력이 아니라 이를 방해하는 관성이나 타성이 될 수 있다.

저자는 외부 시장의 요구를 가장 정확하게 내부 의사 결정에 반영한 기업만이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동현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