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한국사 전공자로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으레 들려 오는 물음은 군주(고종)가 무능하고 관료들이 부패하지 않았던가,유교의 죄가 크지 않은가 등이다.

이러한 화두는 반성의 의미를 담은 듯하지만 정답으로 삼기에는 너무 직설적일 뿐더러 일본 명치유신의 화려한 성공담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런 설명은 일제가 우리로 하여금 저들의 통치를 달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던 이른바 식민주의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래 학계 일각에서 조선왕조 체력 소진설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시돼 젊은 학생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어 더욱 경계심이 앞선다.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서양의 기계 문명,자본주의 경제,근대국가 체제 등을 수용하는 데 먼저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대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림으로써 서구 열강들을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성공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실패'에 대한 답도 어쩌면 여기서 얻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이 출현한 후 일본도 처음에는 우리 대원군처럼 강한 외세 배격에 나섰다. 초기에는 양이(攘夷) 운동이 판을 쳤다. 막부 내에 강 · 온 양론이 대립했고,지방의 번(藩) 가운데는 서양 외교관을 살해하고 외국 선박을 공격해 말썽을 일으킨 곳도 있었다. 또 외세에 대한 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과 막부 양측이 합력하는 공무(公武) 합체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 군대와 두어 차례 힘을 겨뤄 본 뒤 일본 지도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전투력의 현격한 차이를 경험하면서 배격의 자세를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대결에 앞장섰던 초슈(長州) 번이 영국군과의 두 차례 싸움에서 패하자 주도권을 다투던 사쓰마(薩摩) 번과 연합을 선언하면서 개국 운동에 앞장섰다.

존왕양이(尊王攘夷),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 배격 운동을 버리고 개국 · 개화로 돌아섰다. 이것이 곧 명치유신의 시작으로,페리 흑선 출현 후 15년 만에 도달한 귀착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귀착이 거듭된 타협을 통해 얻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유신 3걸로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오쿠보 도시미쓰(大久保利通) 등은 모두 타협을 이끌어 낸 중재자들이었다. 타협을 위한 중재의 성공, 그것이 명치유신 성공 신화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협의 명분과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정치 세력은 당시까지 각 지방의 번 중심이었다. 사무라이나 상인들의 애국은 번주(藩主)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신 3걸들은 그 애국을 일본,곧 천황에 대한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서양 열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력 집결을 위한 타협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명치유신 성공의 핵심이 이러한 타협의 정신이라고 판단할 때,우리가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도 자명해진다. 서양 세력에 대한 대응을 놓고 우리도 쇄국과 개국,두 길로 갈리었다. 그런데 타협이 없었다. 군주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선준비 후개방' 정책이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척화'의 이름 아래 강경 일변도로 치닫자 큰 걱정에 빠졌다. 우수한 서양 기계문명을 수용하여 국력을 키워야 할 때인데 반대로 배격 일변도이니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873년 말에 친정을 선언하여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고,7~8년간 외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1882년 4월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성공하였다. 이 조약은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30%까지 규정하여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관세 자주권을 실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이것이 실현되면 아들의 노선이 고착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 무리들을 모아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청년 군주 고종의 개화 프로젝트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일본은 군란의 직접적인 피해자란 조건을 최대로 이용하여 자국과의 관세율을 반 정도로 내리고 최혜국 조관을 요구,불평등 조약의 시대를 열어놓고 말았다. 왕실 부자간에 이렇게 타협의 정신이 실종한 상태에서 어떻게 나라의 명운이 순탄하겠는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각지의 번주 출신들이 재력을 모아 서양으로부터 크고 작은 증기선을 사서 천황에게 바친 수가 10년 안에 근 100척이나 되었다. 명치정부 초기의 군함,화물선,우편선 등은 대부분 이러한 헌상물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뒤 겨우 1척의 군함을 구입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다. 우리나라도 상인들이 대한제국을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이미 격차는 크게 나 있었다.

명치 일본에서는 어떻게 타협과 협력이 잘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가 극일(克日)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다. 일본 무사의 쇼부(勝負) 세계에서 패배는 죽음을 뜻한다. 패배는 더 이상 존속의 명분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영국,프랑스군과의 대결에서 상대방의 절대적 우세를 느끼자 대결을 멈추고 그들의 기술을 습득하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힘 키우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러시아를 이기기 위해 한반도 선점론을 펴고 나중에는 미국과 태평양 전쟁으로 최종 승부를 겨루었다. 일본 무사도는 근 · 현대의 '문명국' 건설에서도 폭력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한국은 그 폭력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는 근대화의 능력 우열보다 폭력과 비폭력의 관계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의 비폭력 문화 전통은 21세기 동아시아 3국의 평화 공존 논리로서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타협의 정신을 배우고 저들은 쇼부 의식을 바꿀 때 양국 우호 관계에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