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원로화가 김창열 화백(80)은 화업 반세기 동안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국제 화단에서 '물방울 화가'로 통한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 뉴욕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하고 1970년대에는 프랑스로 이주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그림은 시각적인 현상에 시적 충동을 끌어들여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화폭에 아침 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은 정적인 미감을 한껏 뿜어낸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투명하게 녹여낸 모습이 언젠가는 조용히 사라질 것처럼 다가온다. '존재의 부재''비움의 미학'이 여기에서 나온다.

김 화백의 작품에 물방울이 등장한 첫 사례는 1964년작 '제례(162×130㎝)'.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 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 · 비정형)'의 말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는 오른쪽 상단에 점액질처럼 흘러내린 물방울이 하나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돼 있다. 김 화백의 전매 특허가 돼 버린 물방울의 원형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단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앵포르멜이란 게 원래 물감을 캔버스에 짓이기거나 들이붓는 스타일이다 보니 우연히 그런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 일.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모습은 물방울의 형태에 너무나 가까운 것이 아닌가? 단지 투명하지 못하다는 사실만 빼고는 말이다.

김 화백의 작품에 물방울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 무렵이었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 3년 동안 뉴욕의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을 한 그가 비로소 파리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김 화백은 당시 세계 현대미술의 메카로 부상하던 뉴욕에서 한창 유행한 팝아트와 극사실주의를 체험한 후 유럽 현대미술의 본고장인 파리로 옮겨가 기존의 앵포르멜과는 다른 신경향의 그림 스타일을 암중모색했다. 그는 6 · 25 전쟁 때 겪은 처절한 삶의 체험이 응고된 상징적 형태로 물방울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상처가 난 피부를 비집고 나온 고름처럼 찐득찐득한 점액질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1970년도에 제작된 '제전(祭典 · 150×150㎝)'시리즈는 반복된 정방형의 틈 사이로 삐져나온 희거나 노란 점액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처럼 불투명한 점액질이 맑고 투명한 물방울로 변모되는 시기는 대략 1972년 무렵이었다.

이때 그린 '밤의 사건(160×160㎝)'은 어두운 검은색 바탕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단 하나,그것도 매우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크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는 '물방울'이란 제목의 본격적인 작품들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그는 물방울의 존재 양태에 주목한 것이었다. 생마포 천이나 캔버스에 바른 모래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존재하는 수많은 물방울들. 그것들은 풀잎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이제 막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방울의 생생한 모습 그 자체였다.

김 화백의 '물방울' 작품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76년 갤러리현대의 개인전을 통해서다. 캔버스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던 물방울의 모습은 실로 관람객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평범한 물감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물방울'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영롱한 진주처럼 보여 차라리 경이에 가까웠다.

물방울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한 극사실주의 기법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의 존재를 통해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이상적 상태를 동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 화백의 '물방울'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현재 나의 눈앞에 보이되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항구로서의 존재자인 '허상의 시각적 트릭이 빚어내는 드라마'로 느껴졌다.

김 화백은 유년시절에 할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한 장의 종이에 같은 글자를 반복해서 연습했던 이 추억이 작업과 연결된 것은 1986년 무렵이었다. 캔버스에 부드러운 톤으로 쓴 천자문 위에 예의 영롱한 물방울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김 화백의 그림에서 한자는 단정한 인쇄체나 손으로 쓴 서체의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캔버스 상의 구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그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인 셈이다.

현재 파리와 뉴욕,서울을 왕래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는 김 화백은 예술활동의 원형을 한자에서 찾고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바탕을 둔,동양의 뿌리 깊은 문화적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서도와 물방울의 만남은 지역적 특수성이 곧 세계적 보편성과 통한다는 문화계의 오랜 불문율을 입증한 사례인 것이다. 서울 이태원동 표갤러리(02-543-7337)의 '김창열 개인전'(29일까지)에서는 물방울을 소재로 한 김 화백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윤진섭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