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 산하 기관에 다니는 정모 과장은 지난해 말 대형 대부(貸付)업체에서 네 번에 걸쳐 총 1200만원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업체 측은 정씨의 직업이 확실하고 연봉도 5000만원 이상이어서 별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줬으나 올해 초 이자 상환일이 되자 연락이 끊겼다. 일주일 후 겨우 전화통화가 됐지만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으니 앞으로 연락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정씨는 전 금융사를 통틀어 1억여원의 빚을 지고 있었고 집과 자동차 등은 이미 가족 명의로 이전돼 있었다.

정부가 중산층을 복원하고 저소득층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각종 신용회복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이것이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저신용자들을 상대하는 대부업체와 제2금융권은 벌써부터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쏟아져 나오는 빚 탕감 정책들

금융소외자의 신용회복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내건 주요 공약 중 하나였다. 신용회복기금을 설치하고 비제도권 금융사 이용자들을 제도권 대출로 갈아타게끔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대통령 당선 이후 5~6개의 신용회복지원 프로그램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기존의 신용회복위원회(이하 신복위)나 법원을 이용한 프로그램까지 합치면 현재 10여개의 지원책이 마련돼 있다.

지원 방법도 다양하다. 이자율을 낮추거나 탕감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원금까지 최대 50% 감면해 주는 제도도 있다. 법원의 개인파산을 이용하면 아예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올 들어 3월까지 신복위를 통해 상담한 사람은 14만701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4% 증가했다. 실제 신청한 사람도 2만4004명으로 지난해보다 55% 늘었다.

◆대부업체,저축은행부터 타격

시중은행들은 신용등급이 1~4등급인 우량 고객을 주로 상대하지만 앞으로 실시될 프리워크아웃(사전 채무재조정)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시중은행 여신심사부 관계자는 "대출 이자를 갚으라고 전화하면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할 것이라며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나오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신용이 낮아 은행문턱을 넘지 못하는 저신용자들을 상대하는 대부업체 및 제2금융권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대형 대부업체 관계자는 "개인회생 등의 채무재조정을 신청하는 연체자가 늘어나자 법무팀을 중심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 회사 채무자 중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람은 지난해 초까지 매달 200명 선에 머물렀으나 9월 400명을 넘은 뒤 11월 565명,12월 617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올해 3월에는 789명으로 지난해 같은달보다 200% 넘게 증가했다.

A저축은행 관계자는 "개인회생의 경우 원금을 80% 가까이 탕감해주기 때문에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의 20%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리스크 비용이 증가해 최근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향영리스크컨설팅코리아의 이정조 사장은 "개인파산이나 회생제도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다"며 "재산을 빼돌리는 악의적인 파산신청자에 대해 법원이 형사책임까지 포함해 철저하게 책임을 묻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태훈/강동균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