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협동공동체인 달팽이건설의 박영규 상근이사.그는 시민단체가 만든 달팽이건설의 창립멤버로 작년 8월부터 일하고 있다. 그가 맡은 업무는 총무 · 노무 · 인사관리.말이 임원이지 혼자 안살림을 도맡아하고 있다. 박 이사의 이력을 보면 이런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기업에서 임원을 지낸 뒤 레미콘회사를 경영했다. 그런데도 박 이사가 자원봉사와 비슷한 달팽이건설 일을 도맡고 나선 것은 인생 후반에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박 이사처럼 제2의 인생을 살려는 전문직들이 늘고 있다. 은퇴 후 등산 등으로 그저 시간만 때우는 게 아니다. 자신이 가진 전문지식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환원하면서 보람찬 '제2의 인생'을 살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제2의 인생에 만족한다

박 이사가 설계하는 인생은 3등분이다. 25세 때까지는 학교와 군대 등 틀에 짜여진 삶을 살았다. 그후 50세까지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지만 둘 다 원치 않더라도 해야만 했던 삶이었다. 50세 이후엔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그의 희망이었다. 그래서 작년 잘나가던 레미콘회사를 대기업에 팔고 이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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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조흥은행에서 32년간 근무하며 부행장까지 지냈던 한석규씨(61).그는 지금 가톨릭이주노동자사목센터의 필리핀공동체에서 일한다. 필리핀에서 온 노동자들을 뒷바라지하는 게 그의 일이다. 얼마 전까지는 전공을 살려 소액 신용대출인 '마이크로 크레디트' 업무도 담당했다. 한씨는 "2003년 퇴직한 뒤 등산과 여행을 다녔지만 한두 해 지나니 시들해졌다"며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삶을 찾은 느낌"이라고 만족해 했다.

◆'신세대 시니어' 할 일이 없다

이들처럼 대기업 · 금융회사 간부나 공무원 등 전문직으로 종사하다가 은퇴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구현하면서 보람차게 나머지 인생을 살기 원한다. 용돈까지 벌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전문성을 가졌다고 해도 은퇴하면 끝이다. 여기저기 자원봉사에 나서 보지만 교통정리 등 몸으로 때우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수명은 80세에 육박한다. 이에 비해 평균 퇴직연령은 54.1세다. 의학의 발달로 몸도 마음도 젊은 '신세대 시니어'들이 그만큼 많다. 더욱이 최근 들어선 경제위기 등으로 40~50대 퇴직자도 수두룩하다. 하는 일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건 개인으로서도 불행이다. 소중한 인적자산을 방치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선진국은 다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덴마크 일본 등에선 학교나 병원 사회단체 등 비영리기구(NPO)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은퇴자들이 상당하다. 덴마크의 경우 51만명이 가입한 '은퇴자협회'를 매개로 제2의 인생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영국의 '제3세대 대학(U3A)'과 프랑스의 '제3기 인생대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은퇴자 교육 및 활동 알선 단체다. 일본도 'NPO 지원센터'와 '시니어 소호 보급살롱' 등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전문직 퇴직자를 위한 '행복설계 아카데미'

현재 전문직 퇴직자들을 교육해 3만여개의 NPO에 소개해 주는 활동을 활발히 하는 곳은 시민사회단체인 '희망제작소'다. 박 이사나 한씨가 새로운 삶을 찾은 것도 희망제작소가 대한생명 후원으로 운영하는 '행복설계 아카데미'를 통해서다.

행복설계 아카데미 과정은 4단계로 이뤄진다. 우선 40여시간의 교육을 받는다. 은퇴의 의미와 그 이후의 생활,NPO의 의미 등에 대해 배운다. 그후 1 대 1 상담을 통해 필요한 교육과정이나 적합한 활동 등을 모색한다. 3단계는 NPO 현장실습이다.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와 아힘나 평화학교(대안학교),선행칭찬운동본부,노인종합복지관 등 NPO를 직접 방문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체험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후엔 수료자의 욕구를 따져 적합한 NPO에 소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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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설계 아카데미 과정은 지금까지 8기가 진행됐다. 수료자는 총 208명.이들 중 50%인 104명이 다양한 NPO에 참여하고 있다. 40명은 상근직으로 소액이나마 급여를 받고 있다. 제9기 행복설계 아카데미는 오는 8일부터 시작한다. (문의 070-7580-8141)

◆은퇴자를 위한 교육과정 활성화돼야

NPO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직 은퇴자들의 만족도는 100점 이상이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위한 '세이브 칠드런'에서 일하는 최혜정 부장은 광고회사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다 행복설계 아카데미 1기생으로 참여했다. "광고회사는 효율성만 따지는 데 비해 이곳에선 참여나 보람 등이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게 무엇보다 좋다"는 게 최 부장의 예찬론이다.

은행 지점장을 지낸 뒤 행복설계 아카데미 1기생으로 참여한 김신형씨(60)는 "제2의 인생은 이런 것이라는 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들은 "행복설계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몰랐다면 그렇고 그런 노후를 보냈을 것"이라며 "수많은 전문직 은퇴자들이 보람찬 제2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이 같은 프로그램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