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기운이 완연하다. 그렇지만 김 과장,이 대리에게는 아니다. 인원 감축과 임금 삭감이란 공포가 오히려 커지고 있는 탓이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물론 대놓고 나가라거나,임금을 깎겠다는 기업은 아직 드물다. '일자리 나누기(잡셰어링 · job sharing)'로 대표되는 고통분담 분위기가 엄존하는 덕분이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론 다르다. 희망퇴직이나 근무지 이동이란 명분 등으로 은연중 나가달라는 압력이 심해지고 있다. 신입사원 임금을 깎아 일자리를 만들자는 분위기를 틈타 임금 반납이나 삭감을 강요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그러다보니 쌓이는게 스트레스요,늘어나는게 눈치다. 임금 반납은 그래도 낫다. 희망퇴직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말을 흘리는 상사를 대할 때면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프다. 불경기가 길어지면 감원이 불가피하다는 경영진의 말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그렇지만 어쩌랴.하루 아침에 경기가 좋아지거나 자기 능력이 배가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걸.결국은 불황 스트레스를 안고 봄 같지 않은 봄날을 지낼 수밖에 없다.


◆'설마 나까지?'…실직공포 확산

대기업 마케팅 부서 소속인 김선호 과장(39 · 가명).그의 기상시간은 이달부터 1시간30분 빨라졌다. 회사가 최근 불황 극복을 이유로 현장경영 강화 방침을 발표하면서 근무지가 서울에서 경기도 기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근무지 변경으로 수면시간이 줄어든 데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생산관리 업무를 익히느라 오후만 되면 녹초가 된다.

육체적 스트레스만이 아니다. 회사가 비용 절감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동결과 특별상여금 축소 방침,연월차 수당 폐지 등은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 사실상 10%에 육박하는 연봉 삭감액은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 두 아이의 1년치 학원비다. 더욱이 본부 인력을 현장 지원부서로 배치한 것은 인력 구조조정을 염두에 둔 것이란 소문마저 돌고 있다. '굴러온 돌'인 본사 인력들이 '박힌 돌'인 기존 현장인력을 빼낼까봐 가뜩이나 낯설어하던 팀원들의 얼굴 빛이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세계적인 회사가 설마 막무가내로 자르기야 하겠느냐고 위안을 삼고 있지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아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조금만 더 붙어 있자'…담쟁이족 고개

2007년 공채로 A저축은행에 들어간 김모씨(30).입사 때만 해도 김씨는 최소한 10년은 한 직장에 정을 붙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올초 있었던 구조조정을 보고 김씨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지점장급도 아닌 대리 · 과장급 상당수가 이미 직장을 떠났다. 심지어 김씨 동기인 입사 3년차 행원도 사표를 써야 했다. 물론 희망퇴직이라는 말로 포장됐지만 사실상 권고사직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결국 '잡셰어링'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운좋게 잘리지 않은 직원들도 임금 삭감 소나기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대리와 과장급 연봉은 5% 삭감됐다. 대리 미만 일반 직원들의 연봉도 3% 깎였다. 연봉뿐 아니라 일반 경비도 줄었다. 지점이나 부 단위 회식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매주 경비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를 하나 이상씩 제출해야 하는 부담도 생겼다. 그러다보니 주말마다 이직 관련 정보와 경비 절감 아이디어를 사냥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다. 김씨는 "공채 인력은 회사에서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손대는 걸 보고 정나미가 떨어졌다"며 "동기들 대부분이 대리까지만 경력을 쌓고 다른 회사로 옮길 궁리를 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능력있으니 나가달라?'…살생부의 명암

디자인전문회사 입사 5년차인 커리어 우먼 김수미씨(29 · 가명).그는 지난 1년간 고생해 뺏던 몸무게가 올 들어 7kg이나 늘어 고민이다. 이달 말까지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백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그는 직원 40명인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꼽힌다. 지난해 대기업을 상대로 한 경쟁 PT(프레젠테이션) 기획의 3분의 1 이 그의 손을 거쳤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경기침체로 일감이 절반으로 줄었다. 급기야 회사 사장은 정규직 2명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했다.

분위기가 뒤숭숭한 시기에 가진 회식이 화근이었다. 남자 직원들은 가족 얘기를 늘어놓으며 줄담배를 피워댔다. 다른 여자 선배는 최근 학부형이 됐다며 잘려서는 안 된다고 읍소했다. 급기야 팀장이 "능력도 있는데다 미혼이고,나이도 가장 어리니까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김씨를 설득했다. 선배들의 비굴한 모습에 화가 치민 김씨는 즉시 "그러겠다"고 쿨하게 답했다. 술이 깬 다음날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그는 "워낙 어이없는 권고사직이다보니 섭섭함보다는 안쓰러움을 더 많이 느낀다"며 "차라리 지난해 직업군인인 남자친구의 청혼을 받아들일 걸 그랬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엄친아 후배가 생겼다'…잠못이루는 밤

국내 대형 홍보회사 4년차인 황인성씨(31 · 여).그는 요즘 아침을 먹어도 소화가 잘되질 않는다. 인턴사원으로 들어온 20대 여자 후배가 마음에 걸려서다. 후배는 명문대 출신에 얼굴까지 예쁘다. 일까지 똑부러지게 해치우는 데다 태도도 깍듯하다. 당연히 회사 안팎에서 인기가 높다. 황씨는 그러나 그 후배가 '이유없이'밉다. "내가 추진하다 포기한 지자체 특산물 홍보프로젝트를 최근 회사가 후배에게 맡기면서 불안감이 더 커졌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후배가 만약 정규직으로 채용되면 자신이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솔직한 걱정이다.

잘난 후배만 눈엣가시가 아니다. 국내 한 카드회사는 영업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최근 팀제 개편과 함께 인사 총무 등 전통적인 관리형 부서 고참직원들을 대거 영업부서로 발령냈다. 이 회사 고객개발팀 팀장인 최모씨(45)는 "부원 7명 중 선배가 3명이나 들어와 회의 때마다 껄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 직원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선배들은 사표를 내지도 못하고 죽을 지경이라는 얼굴빛이 더욱 역력하다"고 덧붙였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