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연합군은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낸 뒤에도 계속해서 독일 본토로 쳐들어갔다.

이들 중 미군 보병 3사단과 프랑스군 제2 기갑사단이 1945년 5월4일 마침내 독일 남부 바바리안 알프스 인근에 있는 소도시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을 점령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아주 단기간 프랑스 영토이기도 했던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산 중턱에 개발된 오베르잘츠베르그(Obersalzberg) 지역에는 히틀러가 전쟁 중 두 번째로 많은 시간을 보낸 생활의 터전이자 나치 군대의 주요 지휘소인 베르그호프(Berghof)를 비롯 궤링,궤벨스,히믈러 등 나치의 주요 수뇌부들의 저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곳이 세인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은 이유는 12세기 암염을 파내 만들어진 동굴 속에 나치 군대가 점령지에서 약탈한 금은 보화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품들과 함께 수많은 고급 포도주들이 저장돼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특히 베르그호프보다 1000m 이상 높은 산 정상에는 히틀러의 50회 생일을 기념해 1939년 국가에서 지어 헌납한 여름별장 용도의 수수한 2층 석조건물인 '켈스타인하우스'(Kehlsteinhaus · 사진)가 있다.

영어권에서는 이 건물을 일명 '독수리둥지'(Eagle's Nest)라고 부르지만,실제로 이 별명을 붙인 사람은 프랑스 외교관이다.

비록 히틀러 자신은 고도가 너무 높아 숨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생전에 고작 열 번도 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심한 공습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매우 단단하게 지어졌다. 건물이 세워진 바위산의 지하동굴 내부에는 독수리둥지로 올라가기 위한 화려한 장식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데,이를 위해 나치는 124m 높이의 수직갱도를 뚫었다.

독수리둥지 지하저장고의 두터운 철문을 열기 위해 소형폭탄이 사용됐다. 제일 먼저 저장고에 들어간 군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거대한 규모의 저장고에는 나치가 수탈한 수많은 고급 와인들로 마루에서 천장까지 선반과 공간마다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샤토 라피트 로실드''샤토 라투르''샤토 디켐' 등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보르도 와인은 물론 '로마네 콩티' 같은 값비싼 부르고뉴 와인들도 박스에 담긴 채 마구 쌓여져 있었다.

이 밖에도 포르투갈의 명품 와인 '포트'와 함께 최상의 코냑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이들은 모두 19세기에 생산된 진귀한 것들이었다.

샴페인 또한 '크뤼그''볼랑제''모엣 샹동'은 물론 '르 메스닐 시르 오제르' 지역에서 생산된 최고 품질의 1928년산 '살롱 샴페인'도 수백 상자가 발견됐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무런 준비 없이 독일군에게 고급 샴페인을 속절없이 탈취당했던 상파뉴 지방의 샴페인하우스들 중에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저장고 내부에 또 하나의 벽을 쌓고 그 공간에 샴페인들을 보관하는 기지를 발휘해 무사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하우스들은 이번에도 보관 중이던 우수한 샴페인들을 상당량 빼앗긴 경우가 많았다.

인근 빌라에서도 수많은 고급 와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궤링의 저택에서만도 1만병이 넘는 최고급 포도주가 발견됐다. 최종적으로 연합군이 독수리둥지에서 환수한 모든 와인을 병수로 세면 거의 50만병이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고급 와인에 대한 욕망에는 국적이 따로 없다. 독일 나치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제3제국 창시자이자 독수리둥지의 소유주였던 히틀러 자신은 와인을 즐기지 않았지만,제국의 공식 계승자였던 궤링,힘멜 같은 나치의 수뇌부들은 고급 프랑스 와인에 깊이 심취돼 있었던 것이다.

최승우 와인 칼럼니스트 · 여유공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