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KIKO,Knock-In Knock-Out의 영문 첫 글자에서 따온 말,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 상품) 가처분 소송이 2라운드에 돌입했다. 현재까지의 스코어는 은행 측이 7전4승3패로 기업 측에 조금 앞선 형국이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갯속이다.

무엇보다 심판이 바뀌었다. '사정변경 원칙'(환율 급등으로 계약의 기초가 된 객관적 사정이 계약 후 현저히 변경되었기 때문에 기존 계약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을 내세워 은행 측에 일격을 가했던 전임 이동명 수석부장판사를 비롯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50부 판사 4명 중 3명이 인사이동으로 자리바꿈했다. 새 심판장은 박병대 수석부장판사가 맡는다.

이 부장판사의 '사정변경 원칙'은 브라질 등 해외에서도 인용할 정도로 '파격'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재판부의 인적구성 변경이 내달 초께부터 결말이 나올 63건 소송의 향배에 미칠 여지가 적지 않은 셈이다. 지난달 26일 서울중앙지법 358호 법정에서 열린 특별기일에 입추의 여지 없이 방청석이 꽉 찬 것도 이 같은 사정이 반영된 때문이다.

로펌 간 자존심을 건 다툼도 점입가경이다. 김앤장과 로고스가 대표선수로 나섰지만 물증 제시가 최대 관건이기 때문에 녹록지 않다. 은행 측을 대리한 김앤장에서는 김수형 변호사(사법연수원 11기)가, 기업 측을 대리한 로고스에서는 김용호 변호사(연수원 12기)가 총대를 멨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이다.

지난 특별기일날 양측의 변론은 맞수답게 팽팽한 접전이 펼쳐졌다. 전임 재판부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에서 계약 후에 고객보호의무를 다했다면 효력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나온 만큼 사후고객보호 의무를 다했느냐 여부를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김수형 변호사는 은행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녹취자료를 바탕으로 증거를 제시하며 이성적인 비판에 주력했다. 이를테면 기업 측이 파생상품에 기본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계약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넉아웃(Knock out · 하단방어환율)을 875에서 885로 올려주세요" "2년 계약해주세요. (환율이) 920이 넘어도 다른 수입이 있겠죠"라는 기업 담당자의 녹취록을 증거로 일일이 제시했다.

문제는 은행이 저장하고 있는 녹음파일의 분량이 수년치에 이를 만큼 방대한 데다 여러 기업들의 내용이 섞여 있어 이를 분리해 증거로 제출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 또 본사가 아닌 지점에서 계약을 맺은 경우는 자료가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초기에는 분석할 시간이 모자라 제시하지 못했던 구두계약 당시의 녹음 증거가 검토작업 끝에 드러나 재판에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호 변호사는 은행 측에 비해 상대적인 증거자료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법정에서 적절한 비유를 인용한 감성적인 접근방식으로 재판부를 설득했다. 이날 재판에서 그는 "보험 몇 개 든다고 보험 전문가 되고,당뇨병 앓는다고 의사되는 거냐" "환보험 개념으로 키코에 가입한 기업들은 시계줄 없는 롤렉스시계를 산 것이다" 등 다양한 비유를 들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는 은행 측에 비해 자료 확보가 용이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사후보호의무를 다했다며 은행 측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일부분만 잘라낸 왜곡 자료로 보이는데도 전체 자료를 받지 못해 이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는 것.김용호 변호사는 "'행사가격을 940원에서 5원 더 올려달라'는 발언을 가지고 은행 측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는 증거로 제시하는데 알고 보면 전날 은행 측이 이메일을 보내 945원으로 올리는 게 좋다는 취지의 설명을 한 경우도 있었다"며 "전체 자료 없이 제시된 증거만을 가지고 반박하기가 수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전임 재판부가 내린 7건의 결정을 원점에서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재판부가 바뀐 만큼 신의칙 위반에 의한 효력정지,사후고객보호 의무 등 법리적 문제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박병대 민사수석부장판사는 "전임 재판부가 결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63건의 사건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 이번 재판부만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며 "큰 틀을 짜느라 시간이 조금 걸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민제/김평정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