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한 파출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성철씨(51).그는 한 · 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을 평생 잊지 못한다. 사상 첫 월드컵 4강 진출로 온 나라가 감동의 물결로 들썩이던 그 무렵,그는 만성 간경화로 쓰러져 간 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상의 시한부 생명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간 조직이 섬유질로 완전히 뒤덮여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그는 우여곡절 끝에 그해 말 한 뇌사자로부터 적출한 간을 이식받은 뒤 7년째인 오늘까지도 아무런 문제없이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건강한 장기를 기증받아 회복불능에 이른 장기를 대체하는 장기 이식은 삶의 벼랑끝에 내몰린 환자에게 새 생명을 찾아준다는 점에서 '최후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씨는 그야말로 운이 좋았던 케이스.국내에는 장기 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하는 환자들이 해마다 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기다리다 지쳐' 죽어가는 환자들


실제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임두성 의원(한나라당)이 국립의료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장기이식 대기자 현황'에 따르면 장기 이식 대기 도중 사망한 사람은 2003년 703명,2004년 783명,2005년 770명,2006년 840명,2007년 989명 등으로 증가 추세다. 장기 이식 대기자도 2003년 9619명에서 2005년 1만2128명,2008년 9월 현재 1만8898명 등으로 매년 늘었다. 반면 지난해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은 1870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한 해 평균 8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새삶을 기다리다 숨져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구 100만명당 뇌사자 장기 기증자 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3.1명으로 스페인(35.1명) 미국(25.5명) 프랑스(22.2명)에 비해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조원형 장기기증활성화위원장(계명대 동산의료원장)은 "망자의 몸에는 칼을 대지 않는다는 유교주의 문화가 아직 팽배하다보니 사망자가 생전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해도 유족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식수술은 세계 최고, 장기기증은 최악

이 같은 상황은 특히 국내 장기 이식 수술 수준이 선진국보다 우수하다는 점에서 더 안타깝다는 것이 의료계의 설명이다. 대한이식학회에 따르면 국내 뇌사장기이식 후 생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앞서 있거나 대등하다. 신장 이식의 경우 3개월 생존율이 94.9%로 미국(94.7%)보다 높았으며,간 이식의 5년 생존율도 70.5%(미국 67.6%),췌장 이식도 79.6%(미국 50.6%)로 높았다. 까다로운 심장 이식 역시 74.7%(미국 73.2%)로 근소하게 앞섰다.

의술은 앞서 있지만 언제 혜택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중국으로 장기이식 불법 원정을 가는 환자들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1년 전 중국에서 간 이식수술을 받은 김모씨(47)는 "기다리다 그냥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중국행을 택했지만 후유증으로 일곱 번이나 수술을 받는 등 아직까지 고생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심지어 올초에는 현지에서 신장 이식을 받았던 40대 남성이 부작용으로 신장 제거 수술까지 받았다가 현지에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인터넷이나 공중화장실 광고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불법 장기매매도 한 해 수천 건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뇌사자 장기확보 절차 간소화 시급

현행 규정에 따르면 뇌사 판정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의 2인의 진단 외에도 종교인 · 법조인 등을 포함한 뇌사판정위원회의 사전 심의가 필요하다. 비전문가들의 최종 판단을 위해 절차를 또 거쳐야 하는 셈이다. 정상영 전남대 의대 교수는 "뇌사판정위원회가 꼭 필요하다면 그 규모를 축소하고 실질적인 판정을 할 수 있는 소수 전문위원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가족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행정 서류를 떼어 오라고 하는 등의 부담을 지우는 것은 문제"라며 "스페인 등 외국처럼 장기 기증을 적극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장기 기증에 대한 묵시적인 동의로 간주하는 옵트 아웃(Opt out) 제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적인 장기구득기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는 뇌사자를 확보한 병원이 장기 이식 우선권을 갖도록 돼 있어 '힘 있는' 병원이 장기 이식을 많이 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오래 기다린 환자가 우선 순위에서 배제되기도 하는 불합리한 현상이 벌어진다는 지적이다.

한덕종 대한이식학회 이사장(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교수)은 "장기 이식 활성화를 위해서는 신고의무제나 의무요청제 등을 도입해 전문적으로 잠재 뇌사자를 발굴하고 장기를 구득하는 전문구득기관 설립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보건복지가족부는 뇌사와 장기 기증 활성화를 위해 뇌사 판정 절차 개선에 나섰다. 이미 기증 희망을 밝힌 뇌사자는 가족 2명에서 1명이 기증에 동의하는 방향으로 가족동의절차를 간소화하고 뇌사판정위원회를 폐지하거나 구성을 간소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