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 25층의 신한은행 골드 PB(Private Banking)센터.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여직원들의 상냥한 미소가 마치 특급호텔에 온 듯 착각하게 만든다.

로비를 지나 복도로 들어서자 이곳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양쪽에 쭉 자리잡고 있다. 굳게 닫힌 사무실 안에선 고객과 상담하는 듯한 PB 직원들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온다. 문 앞에는 보안을 위한 음성보호 시스템이 작동 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상담실과 복도 사이에 교란용 음파를 발생시켜 웅웅거리는 소리 외에는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이다.

작년 11월 정식으로 문을 연 이곳은 신한은행이 PB 영업 확대를 기치로 야심차게 출범시킨 영업점이다. 고객으로 가입할 수 있는 최소 금액도 국내 PB센터 가운데 최고인 50억원으로 잡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PB 직원은 은행원 경력 10년 이상의 팀장 4명과 주니어급 4명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관리하는 고객의 총 자산 규모는 무려 1조2000억원.그야말로 최고의 은행원이 아니라면 올 수 없는 이곳을 총괄하는 배두원 센터장(46)은 신한은행의 '마스터 PB'로 통한다. 창 밖으로 종로 거리와 고층 빌딩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사무실에서 PB들만의 숨겨진 세계를 들여다봤다.

배 센터장은 우선 각종 상패와 상장,자격증 등이 놓여 있는 진열대를 보여줬다. 그는 2005년부터 3년 연속 '베스트 프라이빗 뱅커'를 휩쓸었다. 신한은행과 제휴를 맺고 있는 BNP파리바에서도 '신한BNP파리바 최우수상'을 2006년부터 2년 연속 받았다. 작년 8월에는 한 신문사가 주최한 PB대상에서 개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상을 참 많이 받으셨네요. 대체 비결이 뭔가요?

"고객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점을 인정해주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고객과 두터운 신뢰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지요. "

▼고객에게 신뢰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무리 사소한 일도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하면 돼요. PB 고객들은 은행 직원보다 훨씬 똑똑한 분들이 많습니다. 웬만큼 공부해서는 고객들에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죠.또 한발 빠른 정보를 드리기 위해 오전 7시에 출근해 각종 리포트,경제신문 기사 등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오전 중에 고객에게 먼저 전화로 시장 상황과 투자전략에 대해 브리핑을 해드리죠."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은행 내부 전문가는 물론 외부 전문가 간 네트워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각 분야별 권위자를 정기적으로 초청해 비공개 강연회나 세미나를 갖기도 해요. 이렇게 형성한 인맥은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닥쳤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됩니다. "

▼많은 고객들을 상대할 텐데 무리한 청탁이나 요구로 난처했던 경우는 없었나요?

"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확정금리를 보장해 달라거나 목표 수익률을 무턱대고 높여 부르는 고객들을 간혹 만납니다. 최근 환차익을 노리고 국내 투자를 원하는 해외 투자자 한 분이 오셨는데 나중에 투자금 회수 등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은행에서 100% 지급보증을 해 달라고 요구해 난감했죠."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합니까.

"물론 은행 차원에서 정한 원칙이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요구를 모두 들어드릴 수는 없어요. 대신 수익률과 위험의 상관관계와 투자와 관련한 각종 법률적 문제 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드리죠.100% 지급보증을 요구하던 해외 투자자 역시 국내법의 특수성과 리스크 관리에 대한 제 설명을 듣고 나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 줘서 고맙다'며 결국 30억원이 넘는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인 분들한테는 '노(No)'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지요. "

▼강남센터에서 PB 업무를 시작할 때부터 수익률이 꽤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처음 PB팀장이 된 게 2003년 2월인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직후였죠.당시 정부가 대선공약인 행정복합도시를 비롯해 각종 대규모 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토지보상금 등이 엄청나게 풀렸어요. 이 같은 과잉 유동성이 자산 가격을 끌어올렸고 주식 · 펀드 · 부동산 할 것 없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물론 제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투자한 게 효과를 보기도 했겠지만 6년간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수익률을 올린 것은 아무래도 시대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지 않나 생각해요. "

▼은행원답지 않은 푸근한 인상도 한 몫 했을 것 같은데요.

"제가 시골(경북 포항)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아요. (웃음)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동지상고를 나왔죠.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진학 대신 바로 한일은행(현 우리은행) 입사를 선택했습니다. 은행에 다니면서 야간으로 대학(계명대 무역학)을 마쳤고 1992년부터는 신한은행으로 옮겨 지금까지 근무해 왔습니다. 제가 잘난 게 없다 보니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고객들을 대했는데 그게 인상으로 굳어진 것 아닌가 싶어요. "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로 시장 상황이 많이 어렵죠? 마음 고생도 많겠어요.

"그렇죠.은행들마다 PB 권유로 가입했던 펀드나 채권에서 반토막이 난 고객이 수두룩 하죠.거세게 항의하는 고객들로 몸살을 앓는 PB들이 적지 않습니다. 욕설은 기본이고 멱살을 잡히는 등 신체적인 위해까지 당하기도 합니다. 그만두는 PB도 많이 늘었고요. 다행히 제 고객들은 아직도 믿고 따라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모 그룹 회장님은 오히려 '혹시라도 인사 조치 같은 게 내려질 조짐이 보이면 얘기해라.직접 행장을 뵙고 잘 말씀드려 주겠다'고까지 하셔서 제가 오히려 감동받기도 했지요. "

▼투자와 관련해 요즘 어떤 조언을 하나요.

"현재 시장은 변동성이 워낙 커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고객들에게 최소한 올 상반기까지는 현금 보유 비중을 늘려 안전자산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가져가도록 조언하고 있습니다. "

▼PB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 PB는 정년이 없습니다. 고객과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일하기 때문에 능력만 갖춘다면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업이죠.특히 저를 믿고 자산을 맡겨 주시는 고객님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도 큽니다. 한 예로 지금까지 제가 소개한 커플이 두 쌍 탄생했는데,미국 뉴욕에 사는 한 커플한테는 요즘도 종종 연락이 와요. "

▼PB가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네요.

"원스톱 뱅킹 서비스는 물론 각종 투자 상담,자녀 결혼 중개,의료 지원까지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은행 PB의 역할이 '금융 집사' 개념으로 확장될 전망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를 이어 PB 서비스를 받는 사례도 늘어날 것입니다. 선진국 은행들의 경우 이미 이 같은 서비스가 보편화돼 있어요. "

▼PB가 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좀 더 멀리 내다보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어요.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고객과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워요. 부자들은 매년 들쭉날쭉한 수익률보다는 좀 작더라도 꾸준한 성과를 더욱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전문 지식을 쌓고 취미생활과 여행 등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 앞으로 PB로 활동하는 데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

글=이호기/사진=김병언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