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 사흘째인 18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 명동성당에는 바쁜 일정에 쫓기는 재계 유력 인사들이 연이어 조문했다. 이들은 경영 현안을 챙기느라 빡빡한 일정을 잠시 미루고 추기경을 조문하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김 추기경이 생전에 우리 사회에 남기고 간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기리고 경제 회복의 의지도 다지는 의미에서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및 삼성 사장단 11명은 서울 서초동 사옥에서 수요 사장단협의회 회의를 끝낸 직후 명동성당을 찾아 조문했다.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김인 삼성SDS · 네트웍스 사장,노인식 삼성중공업 사장,강재영 삼성투신운용 사장 등이 동참했다. 김 추기경과 같은 세례명(스테파노)인 이 회장은 "큰 분을 잃어 슬픈 날"이라며 "추기경님 말씀대로 다같이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말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실 것"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김 전 회장과 함께 온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김 전 회장은 도피 생활 중에도 연락을 취했고,추기경님께서도 기도를 해주셨다"면서 "대우 노사분규 때 추기경님이 격려를 해주신 것으로 안다"고 김 전 회장과 김 추기경의 인연을 소개했다. 김 전 회장은 전 대우그룹 출신 사장들과 만남을 가진 뒤 베트남으로 출국할 예정이었지만,김 추기경 조문을 위해 이를 잠시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여철 현대차 부회장,기아차 정성은 부회장,양승석 현대차 사장,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 현대기아차 그룹 사장단 17명도 빈소를 찾아 김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집전해 주신 인연이 있고,사석에서 '애모'를 부르는 추기경님을 뵌 적도 있다"면서 "추기경님의 선종은 국가적 손해라는 생각이 들며,안타깝고 슬프다"고 말했다.

19일 전경련 정기총회를 앞둔 조석래 전경련 회장과 정병철 부회장 등 전경련 임원 10여명도 명동성당을 찾아왔다. 조 회장은 "김 추기경님은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시기도 하고,어려운 이웃과 항상 함께하면서 우리 사회에 바른길을 제시해주신 큰 어른이셨다"고 슬픔을 표했다.

강유식 LG 부회장,김태오 서브원 사장,신재철 LG CNS 사장,김인철 LG 생명과학 사장 등 LG그룹 계열사 CEO들도 빈소를 방문했다.

이날 집권 당시 김 추기경에게 '꾸지람'을 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도 수행원 10여명과 함께 명동성당을 찾았다. 전 전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김 추기경과 인연이 깊다"면서 "내가 1사단장으로 있을 때 사단 내에 성당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들어줬고 보안사령관 시절에도 개인적으로 추기경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과 동성고등학교 선 · 후배 사이인 영화배우 안성기씨도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늘 제대로 내린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빈소가 개방되기 1시간30분 전인 오전 4시30분부터 조문객이 몰려들기 시작해 하루 종일 장사진을 이뤘다. 장례위원회 측은 17일 9만5000여명이 조문한 데 이어 이날 12만9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빈소를 찾은 것으로 추산했다.

이고운/이상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