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ylendiaminetetra natirumdiacetat solution이 대체 무슨 뜻이야?"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대치3동 법무법인 율촌 사무실.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11명의 직원이 한숨을 쉬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다.

손아름씨(30)가 오전 중 마감해야 하는 영문 계약서의 낯선 단어 하나가 애를 먹인 것이다.

경력 10년차 이상 직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구글,야후 등 각종 포털 사이트와 학술 사이트를 뒤졌지만 아무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오전 내내 매달린 끝에 이들이 내린 결론은 신종 합성어라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화학 논문 등에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결국 '에틸렌디아민테트라초산이나트륨용액'이라는 긴 이름을 달았다. 11명의 직원은 땀을 훔치며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이들의 공식 직책은 패러리걸(Paralegal · 법률보조원).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직업이지만 변호사들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는 대중적인 직업이다.

이들이 없으면 로펌 업무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미국에서 일하는 변호사들의 얘기다.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국내 로펌도 대형화되면서 전문성을 갖춘 패러리걸 팀을 운영하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의 2년차 패러리걸 손아름씨를 서울 역삼동에서 만났다.

▶일반 번역 업무와 패러리걸이 하는 번역 업무는 어떻게 다른가요?

"법률 문서에는 정말 생경한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문서도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매번 새로운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죠.한번은 A4용지 한 장가량의 문서를 번역하는 데 네 시간이 걸린 적도 있어요. 폐기물 공정에 관한 번역이었는데 화학 관련 용어들이 많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기존에 번역된 적이 없는 분야여서 일일이 맞는 용어를 찾느라 그렇게 시간이 걸린 거죠.법률 문서에 나오는 기본 용어마저 몰랐다면 하루 종일 걸렸을 겁니다. 게다가 로펌의 번역 업무는 데드 라인이 촉박합니다. 시간에 맞춰 양질의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에 걸친 전문 지식을 갖춰야 해요. 그런 면에서 일반 번역 업무와는 다릅니다. "

▶실수한 적도 꽤 있을 것 같은데요.

"assignment라는 단어는 많이 쓰잖아요. 예전에 번역 아르바이트할 때는 '권리를 할당하다'는 식으로 썼어요. 그런데 입사한 뒤 계약서에서 처음 이 단어를 본 거예요. 어려운 단어들과 씨름하다가 아는 단어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그대로 번역했죠.근데 제 보고서를 검토하던 선배가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수백억원대의 돈이 걸린 계약이었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된다면서요. 계약서에서 이 단어는 권리 등을 양도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더라고요. 완전히 다른 의미죠.한번은 appropriation이라는 단어를 오역한 적도 있어요. '충당하다'라는 뜻과 '처분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지급 금액을 충당하다'는 내용을 '지급 금액을 처분한다'고 번역했으니 정반대가 돼 버린 거죠.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실수였습니다. 그야말로 단어 하나 하나의 해석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

▶1년간 어떤 게 가장 어려웠나요?

"생소한 용어들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어요. 제가 번역하면 일명 '노란펜 선생님'으로 불리는 팀장급 패러리걸이 기본적으로 체크해 주시는데요,정말 처음 몇 달간은 A4용지 전체가 샛노랗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법률 용어마다 정확하게 맞는 한글 해석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의역한 결과죠.어느 날은 노란 A4용지에 빨갛게 '공부하세요'라는 선배의 충고가 적혀 있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습니다. "

▶어떤 식으로 극복했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용어 풀이집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거예요. 일명 패러리걸들의 '족보'로 불리죠.엑셀 파일에 분야별로 자기가 찾은 용어 풀이를 적어 나가는 겁니다. 나중에 비슷한 종류의 서류를 번역할 때 시간이 엄청 절약되죠.패러리걸들은 본인만의 족보를 만들면서 회사 차원에서 공유하기도 합니다. 제 개인 족보는 이미 100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어요. 저만의 자산이죠.나중에 이런 법률 용어들에 대한 풀이를 담은 책을 공동으로 내는 게 꿈입니다. "

▶패러리걸이 된 계기는?

"원래 꿈은 국제 기구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양대 경영학과와 서강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하고 잠깐 외국계 회사의 한국 사무소에서 일했는데 저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데 제가 책 보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좀 힘들더라고요. 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술을 많이 마셔야 하는 것도 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찾아 보던 중에 율촌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어요. 생소한 분야이지만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패러리걸의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아침 9시에 출근합니다. 일단 PC를 켜면 업무지시 이메일이 도착합니다. 업무 지시는 수시로 떨어지기 때문에 항상 주시해야 해요. 지시받은 업무를 데드 라인에 맞춰 계획을 짜서 처리하는 거죠.업무가 폭주하지 않는 한 야근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후 6시께 '칼퇴근'이 보장되는 셈이죠."

▶현재 업무에 만족하시나요?

"이제 막 1년이 지났는데요. 정말 저에게는 이 일이 딱 맞습니다. 일을 한다기보다 매일매일 업무가 새로운 공부라서 정말 재미있습니다. 법률 문서의 종류는 한도 끝도 없거든요. 같은 공정거래 번역이어도 대상이 반도체 회사일 수도 있고 유통업체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히 해당 분야에서만 쓰는 용어들이 자주 나오는데 대부분은 생소한 분야의 용어들이죠.번역을 하면서 해당 분야를 조금씩 들여다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직장인이라기보다는 학생 같아요. 그리고 직장 분위기도 매우 좋습니다. 변호사들이 항상 클라이언트를 대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패러리걸들을 존중해 줍니다. 대형 조직이기는 하지만 사람 사이의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편이죠.전문가 집단으로 대우받기 때문에 직장 내 위상도 괜찮은 편입니다. "

▶패러리걸끼리는 어떤가요?

"별다른 상황이 없는 한 다들 조용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떤 날은 아침에 출근한 뒤 점심시간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한 적도 있죠.서류를 파고드는 작업이 주 업무이니까요. 면벽 수련하듯 조용히 번역에 몰두하는 거죠."

▶패러리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특별한 자격증은 없습니다. 국내에서는 대형 로펌이 뽑을 때 지원하면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영어 번역과 법률 상식 등의 시험을 봤어요.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면접을 봤습니다. 다른 로펌들도 비슷하게 뽑는다고 하더군요. 같이 일하는 분들 보면 통역대학원이나 국제대학원 출신이 많아요. 법대를 나온 분들도 상당수 되고요.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주를 빼고는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몇몇 학교에 패러리걸 과정이 있어 기본적인 법학 공부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

▶가족들도 만족해하겠네요.

"이제 4개월 된 쌍둥이가 매일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시간 맞춰 들어가 엄마 노릇도 하고 아이들 재롱을 보다 보면 업무 능률이 높아집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요.

"일단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 싶어요. 로펌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패러리걸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거든요. 번역 업무에 익숙해지면 미국 패러리걸들이 하는 조사 업무 등 다양한 법률 업무를 익히고 싶습니다. "

글=박민제/사진=허문찬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