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요건과 기준 제시…"입법 필요해"

고법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조건을 제시, 이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지난해 11월 서울서부지법의 1심 판결에 이어 서울고법도 10일 식물인간 상태인 70대 여성이 대리인을 통해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라"며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을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고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 결정권에 근거해 치료 중단이 가능하다고 봤으며 무분별한 생명 단축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들어 어떤 경우에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제시했다.

기본적으로는 입법 조치가 필요하지만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이미 사망 과정에 진입해 임종이 임박했다고 판단되면 입법 없이도 일정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지 엄격히 판단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시된 기준은 ▲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는 비가역적인 사망과정에 진입할 것 ▲ 환자에게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중단 의사가 있을 것 ▲ 고통을 완화하는 치료나 일상적 진료는 중단 불가 ▲ 의사(醫師)에 의한 치료 중단의 시행 등이다.

즉,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무의미한 환자가 연명 치료 대신 자연스런 죽음을 맞으려는 의사(意思)를 분명하게 지녔다면 치료를 중단할 수 있지만 충동적이거나 단편적 의사 표명에 따라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아울러 고통을 줄이거나 질병 치료를 위한 일상적 진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 유지에 필수적인 처치이기 때문에 사망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야 하고 단지 사망을 지연시키는 `연명치료'만을 중단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물론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도 의료행위인 이상 의사(醫師)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환자가 실제 회생가망성이 없는 비가역적인 사망과정에 진입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담당 의사의 견해를 존중하되 제3의 중립적 의료기관의 확인이 더해져야 하며 환자의 의사를 추정ㆍ판단할 때도 환자 상태나 가족의 상황 등을 함께 고려하는 등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1심의 증거조사와 사실 인정, 판결 논리를 전반적으로 수용했고 "해당 환자가 회생가능성이 없는 사망과정에 진입했으며 치료를 중단하려는 합리적 의사를 지니는 등 위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고 결론 냈다.

이번 판결은 따라서 연명치료 중단 요건과 절차를 규정한 관련 법률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사건을 판단한 것이지만 재판부가 밝혔듯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환자와 가족에게 공통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들어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판결이 확정된다면 재판부가 제시한 기준이 개별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사실상의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고, 향후 입법 과정에서도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기준이 적절한가를 놓고 그만큼 논란도 예상된다.

또 이와 별개로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환자가 사망 과정에 들어갔는지, 그의 치료중단 의사(意思)를 어떻게 추정ㆍ판단할 수 있는지 등을 둘러싸고 논쟁과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sewon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