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강호순으로 싸이코패스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졌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 평소 동물학대와 동물살해도 서슴치 않았다는 싸이코패스 강호순.

이런 강호순의 모습 상당 부분은 한중록과 조선왕조실록에 묘사된 사도세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보통 사도세자는 당쟁의 희생양으로 죽었다고 평가받고, 그에 대한 기록 상당수는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수정되고 덧칠되고 모호해졌다. 그렇지만 그가 이런 저런 심리적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수도 없이 연쇄적으로 죽였다는 팩트 자체만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싸이코패스 였을지도 모르는 묘사들도 자주 눈에 띤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 곳곳에선 사도세자의 살해모습이 전해진다. 마치 경찰의 사건조서를 보는 것 처럼 묘사가 상세하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홍씨가 사람을 죽였다고 기술한 날 기록에 일언반구 그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지만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세자가 살해를 저질렀음을 전하는 기록이 훗날 기술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명확하게 세자의 살인기록을 전하는 실록의 기술은 뒷날 세자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할 때가 되서야 등장한다. 기록을 보면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다”라고 짤막하지만 명확하게 세자의 연쇄살인을 확인사살 하는 것.

우선 한중록에 묘사된 사도세자의 살인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해(1757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화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내관 김한채라는 것을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 하였다.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을 여럿 죽였다.”

사도세자가 왜 사람을 죽였는지 요즘으로 치면 경찰수사 결과같은 심경토로도 있다. 강호순이 평소 키우던 개를 가혹하게 죽였다는 사실이 연상되는 발언도 있다.

“제 마음속에 울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낫습니다.”(사도세자) “어찌하여 그러느냐?”(영조) “마음이 상해 그렇습니다.”(사도세자)”

이어 혜경궁 홍씨는 사람을 죽이고도 별다른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러고는 사람 죽이신 수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영조에게) 세세히 다 말씀드렸다.”(무인년(1758년) 2월27일)

사도세자의 연쇄살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의 말을 들어보자.

“경진년(1760) 이후엔 내관과 내인이 상한 일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두드러진 예는 내수사 차지 서경달이다. 소조(사도세자)께선 내사의 일을 느리게 한일로 서경달을 죽이고 출입내관도 여럿 상하게 하고 선희궁에 있는 내인 하나도 죽이셨다. 점점 어려운 지경이 됐다.”

이처럼 사도세자가 내시들을 도륙할 때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모호한 표현으로 사도세자의 칼질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후일의 기록에서 유추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들어 영조 34년 3월 6일 임진일조 기록이 대표적이다.

실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근래에 기(氣)가 올라가는 증세가 때로 더 심함이 있어 작년 가을의 사건(내인을 죽인일)까지 있었는데, 이제 성상께서 하교하신 처지에 삼가 감읍(感泣)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지나간 일을 뒤따라 생각하니 지나친 허물임을 깊이 알고 스스로 통렬히 뉘우치며, 또한 간절히 슬퍼한다. 내관(內官) 김한채(金漢采) 등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후하게 거행하여 나의 뉘우쳐 깨달은 뜻을 보이라.”

막상 김한채를 죽인날엔 아무 기록이 없다가 다음해에 김한채를 죽인일을 후회해 '보상금‘을 후하게 주라는 기록인 것.

이같은 사도세자의 연쇄살해가 실록에 명확하게 적시되는 때는 결국 영조에 의해 세자가 세자 자리를 잃고 서인이 됐을 때다.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을해일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 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4) ·무인년(153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 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실록에서 정치적 패자이자 목숨까지 잃은 희생양인 사도세자에 대한 평이 좋을 까닭은 없겠지만 사도세자가 사람을 잇따라 죽인 사실만은 그에 대한 평을 떠나 부인할 수 없다. 이들 기록이 그가 싸이코패스 였다고 확증하기엔 부족함이 있고, 자료의 편향성과 모호성 때문에 앞으로 싸이코패스 여부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록처럼 사도세자가 양심의 가책없이, 단지 울적한 마음을 풀기위해 습관적으로 사람을 죽인게 사실이라면 그가 싸이코패스가 아니라고도 단언하긴 힘들 것 같다.

이와 함께 뒤주 속에서 굶어 죽었다는 비운의 세자의 삶 못지않게,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내시와 궁녀들의 억울한 죽음은 어떻게 평가되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누구에게 보상을 청구해야 하는 것일까?

<참고한 책과 사이트>

혜경궁 홍씨, 한중록, 이선형 옮김, 서해문집 2008
국역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온라인 서비스)

ps.개인적으로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사도세자에 대한 글을 찾으려 한중록을 참고하려 했다. 하지만 몇 년전 장가가면서 본가에 책을 놔두고 오는 탓에 시일이 꽤 지났음에도 기록을 참조하지 못했다.

뒤늦게 본가에서 책을 찾아 뒤졌지만 분실된 탓에 얼마전 다시 서점에서 새로 한중록을 구입하게 됐다. 하지만 약 16년전쯤 구입했던 판본에 비해 요즘 새로 나온 판본들은 번역도 충실하고 보기에도 편한 편집으로 읽고 참조하기에 매우 좋았다. 그림이나 용어설명 등 관련 자료들도 한눈에 손쉽게 볼 수 있게 편집돼 있었던 것도 눈에 띠는 변화상.국사편찬위원회의 온라인 조선왕조실록 국역서비스도 활용해 볼수록 보물섬 같다는 생각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부하기는 점점 좋은 세상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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