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경찰 책임' 법리검토에 참고

검찰이 용산참사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여부를 가리기 위해 참고한다고 밝힌 `웨이코 사건'은 1993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정부 무장요원의 진압작전 과정 때 발생한 대규모 인명 살상 사건이다.

2일 검찰에 따르면 미 연방정부는 텍사스주 웨이코 외곽 카멜산의 한 건물에 집단거주하는 종말론 종교인 `다윗파' 신도와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가 기관총 등 무기를 비축하고 마약복용, 미성년자 간음을 일삼고 있다며 위험한 사교 집단으로 규정했다.

1992년 5월께 무장 사실을 알게 된 당국은 이들이 주변지역 주민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했고 1993년 2월28일 마약단속반(ATF) 전투요원을 투입해 무력 진압을 시도한다.

이때 신도 1명과 ATF 요원 4명이 숨지자 양측은 총격을 멈추기로 했고 미 연방 정부는 이후 51일간 이 건물을 포위한 채 지루한 협상을 벌였다.

어린이 몇 명이 석방되기도 했지만 코레시가 "신의 계시가 바뀌었다"고 선언하면서 진행되던 협상이 이상 조짐을 보이자 FBI를 투입하고 4월19일 새벽 장갑차를 동원, 최루탄을 건물에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이후 이 건물에 불이 났고 어린이 21명과 임신부 2명을 포함해 신도 76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건물 붕괴에 따른 압사, 화재로 인한 소사, 최루탄에서 나오는 사이안화(청산가리) 가스에 의한 중독사였고 20여명은 총이나 칼로 숨진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위기에 몰린 교인들의 집단 자살로 추정됐다.

법원은 기관총을 발사하거나 무기를 나른 다윗파 교도 8명에 대해 최고 40년형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FBI 작전의 불법 여부와 과잉진압 여부였다.

신도들이 제기한 민ㆍ형사소송에서 법원은 2월 첫 작전 때 다윗파가 ATF의 정당한 수색영장 집행에 저항해 총격을 시작했고 ATF가 방어 차원에서 총을 발사했다며 이를 기각했다.

또 4월 2차 최루탄을 사용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최루탄을 건물에 투입한 결정, 최루탄 사용 시 화재가 날 가능성에 대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정부의 임의적 판단에 해당해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정부의 손을 들었다.

법원은 설사 정부가 화재가 나기 전 장갑차로 건물을 부숴 출구를 막았거나 불이 더 빠르게 번지도록 하는 과실을 범했더라도 불을 교도들이 질렀기 때문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소방관들이 건물에 접근하면 총격으로 사상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FBI가 작전 초기 소방차 접근을 허가하지 않은 것도 과실이 없다고 판결했다.

1999년 FBI가 쓴 최루탄이 가연성 최루탄인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이를 전면 재조사하는 특검이 도입되지만 역시 FBI의 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났다.

사건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는데 1995년 정부의 다윗파 소탕작전에 항의하면서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빌딩 폭파사건으로 160여명이 죽었고 빌 클린턴 대통령도 재임 중 실패한 일로 웨이코 작전이 성급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한편 이 사건이 용산참사 수사에 참고할 만한 사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미 정부는 사건을 인지하고 1년 뒤에서야 작전을 개시했고 이후 51일간 협상을 벌였지만 용산 참사는 하루 만에 진압작전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다윗파 신도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언제라도 집단 자살 가능성이 있는 종말론에 빠진 광신도였고 용산 사건은 화염병과 새총이 `무기'였던 재개발지역 철거민 등이었다는 점도 다르다.

물론 다윗파 신도의 근거지가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진 곳이었지만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빌딩은 서울시내 한복판이었다는 점도 두 사건의 차이점이다.

(서울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hska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