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권리..흉악범 훼손될 명예 없다"
"'무죄추정' 반하고 인권침해 소지"


경기 군포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을 계기로 흉악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지목된 피의자 또는 용의자의 이름과 사진을 언론을 통해 공개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다시 사회적 논쟁이 일고 있다.

실명과 사진을 공개해야 한다는 쪽은 미국 등 여러 다른 나라에서는 피의자 신상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는 점을, 반대하는 쪽은 헌법상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나고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점을 서로 강조하며 맞서는 모습이다.

◇ "피의자 실명 쓸까, 말까" = 피의자의 실명 보도 방식에 대한 언론계의 구체적인 합의나 기준은 사실상 없는 상태다.

그나마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6조(사생활보호)의 "개인의 명예를 해치는 사실무근인 정보를 보도하지 않으며, 보도 대상의 사생활을 보호한다"라는 내용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여러 언론사는 따로 윤리강령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대부분 피의자의 실명 및 사진을 보도하는 것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고 기자들의 보도를 규제할 강제력도 갖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피의자에 대한 실명 보도는 주요 사건마다 제각각이다.

혜진ㆍ예슬 양을 잔혹하게 살해해 1ㆍ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정성현(40) 씨의 경우 체포 직후부터 기소될 때까지 대부분 언론은 `정모씨'로 적었다.

언론은 지난해 4월1일 정 씨가 구속기소되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정 씨의 실명을 알리기 시작했다.

서울 서남부지역에서 부녀자 13명을 연쇄 살해해 사형이 확정된 정남규(40) 씨는 체포된 2007년 4월24일 이후 한동안 `정모 씨'로 불리다 약 일주일 만인 5월1일부터 실명이 보도된 경우다.

반면 숭례문에 불을 질러 징역 10년형이 확정된 채종기 씨는 국민적 공분 속에서 체포 직후부터 곧바로 이름이 언론을 탔다.

이번 사건 피의자 강호순(38) 씨도 `강모 씨'로 보도되다 27일 현장검증을 계기로 실명 공개 여론이 높아지자 한 신문이 먼저 실명 보도에 나섰고 이후 대세로 굳어졌다.

이를 종합하면 일정한 기준을 갖고 실명 보도를 결정하기보다는 국민적 분노가 일어 피의자 실명 공개 여론이 높아지면 그제야 이름을 적시하고 일부 언론사가 앞서 실명 보도를 하면 타당성 여부를 떠나 이를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는 게 사실.

◇ 피의자 얼굴 공개는 경찰 몫(?) = 실명 보도의 문제와 달리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할 것인지는 실제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큰 강력사건 피의자들의 얼굴이 신문 지면과 방송을 통해 공개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004년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피의자 보호' 원칙이 강화되면서 모자와 마스크를 씌워주는 관행이 생겼다.

국가인권위도 2005년 피의자 호송 업무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는데 이때부터 경찰은 피의자들이 언론에 노출될 때 얼굴을 가려주게 된 것이다.

2005년 경찰청 훈령으로 마련된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에는 "경찰서에서 피의자와 피해자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장면이 촬영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이 담겨 있다.

◇ 해외 사례 = 일본은 강력사건 등이 발생하면 흔히 용의자의 실명을 공개해왔지만 최근 개인의 익명성 보호가 표현의 자유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와 실명 공개에 대한 반성도 일고 있다.

1994년 일본최고재판소는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사람이 자기 저서에서 오키나와에서 미군과 싸워 상해죄로 복역한 출옥수의 실명을 거론한 사건에 대해 "사회 복귀를 위해 새로운 환경에서 노력한 점에 비춰볼 때 전과를 공표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수사당국도 2005년 4월 전면 시행된 개인정보보호법을 이유로 사건 관계자에 대해 익명 발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웨덴은 1923년부터 1심 판결 때까지는 실명 보도를 금지했고 대부분 권위 있는 신문이 익명 보도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들의 언론 윤리강령은 개인의 실명이 공개돼 피해를 입을 수 있을 때는 신중해야 하지만 예외적으로 공공의 관심사일 경우 실명을 거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직업, 직위, 나이, 국적, 성별 등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특징을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한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 이구현 박사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경향"이라며 "언론이 범죄 용의자의 개인 정보를 다룰 때는 우리보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자 공표 금지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을 하면 90% 가까이 언론사가 패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각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이런 원칙들을 엄격히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상습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총기 난사처럼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 훼손될 명예가 없어 인적사항을 공개할 수 있다는 원칙(plaintiff proof)도 있다고 이 박사는 소개했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에서는 언론보도가 무죄추정의 원칙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경우 판사가 보도 금지 명령을 내리거나 검찰이 피고인 측에 언론 접촉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 관련 법규ㆍ법원 판단은 = 대법원 판례는 익명 보도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인 때만 실명 보도를 허용하고 있다.

범죄 보도는 범죄자들에게 어떤 사회적 제재가 가해지는지 알려주는 것이어서 그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범죄 자체를 보도하기 위해 반드시 범인이나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원을 밝히더라도 진실한 사실로 오직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할 수 없다고 위법성 조각사유를 규정하고 있으며 대법원은 이를 토대로 예외적 허용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통상적인 범죄 보도의 경우 내용이 진실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다고 본다면 결국 실명 공개의 `공익성'이 인정되는지가 관건이다.

또 범죄 혐의자의 실명을 밝히는 게 공익에 부합하는지는 공적 인물이 대상인 경우 공개가 가능하다는 의견에 큰 이견이 없는 반면 사인(私人)이나 공인인지 여부가 불명확한 경우에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쪽에서는 범죄 자체와 범죄인에 대한 보도를 분리해 국민이 범죄인이 누구인지까지는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 대법원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발표를 근거로 무자격자가 마약류를 조제하게 해 적발된 병원의 상호를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는 평범한 의사에 불과해 공적 인물이라 볼 수 없고 국민이 범죄 내용은 알 필요가 있지만 당사자가 누구인지까지 알아야 할 이익이 없다"고 판결했다.

반면 기사 작성에서 행위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사실을 특정하기 곤란하거나 범죄의 재발 방지 또는 범인 체포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공개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흉악 범죄 피의자에 대해서도 신고나 제보를 토대로 은폐된 범행을 규명하는 등 사안이 중대할 경우 공개 사유를 폭넓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실제 이런 사례가 판례로 확립되지는 않았다.

서울고법은 최근 간첩단 사건 피의자로 지목돼 실명과 초상이 공개된 A씨가 낸 소송에서 언론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범죄보도에서 범인의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사실 특정이 곤란하거나 추가적 피해 방지, 범인 체포 목적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예외적으로 허용된다"고 조건을 판시하기도 했다.

얼굴 사진 보도는 실명 공개가 가능한지와 비슷한 기준에 따라 쟁점이 정리될 가능성이 크지만, 초상권 보호의 원칙은 별개의 사안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같은 피의자에 대해서도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 의견이다.

한 판사는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시인이라도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초상이 보도되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판단할 여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 학계 및 전문가 견해 = 대체로 공인에 대한 실명ㆍ초상 공개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으나 흉악범죄 혐의자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을 보였다.

표창원 교수는 "공인에 국민 다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중대 범죄자를 포함해야 한다"며 "2명 이상이 희생된 연쇄살인, 어린이 납치 유괴 살해, 불특정 다수를 살상한 다중 살인 등의 범죄자는 실명과 얼굴이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용석 건국대 신방과 교수는 "중대 사건에 강력한 물증이 있다면 국민의 알 권리, 경각심 환기 차원에서 사회적 합의로 공개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적 논리와 국민의 법 감정 사이의 간극이 있지만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공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정용상 동국대 법대 교수는 현행범이나 확신범 등 재판에서도 혐의가 인정될 가능성이 큰 경우와 강간이나 살인 등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축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얼굴이나 신상 공개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야 하고 공개에 따른 사회적 실익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는 "신원을 공개해 새 피해자가 드러나거나 추가 범행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경우는 예외적으로 공개 의의가 있겠지만 흉악 범죄자라도 인권이 있고 형이 미확정된 상태에서 공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원칙적인 반대 의사를 밝혔다.

또 "큰 사건을 저질렀다고 공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됐다.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공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확실히 판단한 후에 공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사진이나 동영상은 추후 무죄 판결이 확정되면 그 피해를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절대 공개해서는 안되고, 실명은 당사자가 공적 인물인지 사적 인물인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되 `군포 살인' 사건의 경우도 이름을 공개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이세원 김남권 기자 setuz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