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육의 창의적 국가경영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인문학 산책] 小氷期(소빙기) … 틀을 깨는 경제재상이 필요하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선례로 1929년의 대공황이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위기가 1490년께부터 근 270년간 전 인류를 괴롭힌 적이 있다. 흔히 '소빙기(little ice age)' 로 불리는 대재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위기는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天災)였다. 우주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수많은 돌덩이들이 떠 있다. 행성 하나가 미완으로 끝났거나 어떤 사고로 깨져,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이 공간에 떠 있다고 한다.



소행성으로 불리는 돌들은 혜성처럼 태양의 중력에 끌려 타원형 궤도로 돌다가 지구의 원형 궤도와 만나면 중력에 끌려 대기권으로 들어와 그 수량에 따라 크고 작은 재앙을 일으킨다.



길이만 수㎞에 달하는 초대형 돌이 들어오면 지구 생태계가 바뀌고,작은 것도 떼로 들어오면 굉음과 섬광, 보랏빛이 된 태양 등 가공할 현상들이 하늘에 펼쳐진다. 그리고 돌 떼를 싸고 들어오거나 폭발로 생긴 우주먼지는 태양의 빛과 열을 차단해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린다.



여름에도 우박, 눈이 쏟아질 정도로 기상이변이 심해 폐농, 실농이 잦아진다. 이 시기 조선왕조와 같은 농업국이 받은 타격은 치명적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는 이 자연의 대재난 속에 왜란,호란과 같은 큰 전쟁을 겪고서도 망하지 않았다. 잠곡 김육(1580~1658)의 창의적 국가 경영 덕분이었다.

김육이 1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세 때는 아버지가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 중의 기근과 전염병 때문이었다. 6년 뒤 어머니마저 36세에 돌아가셨다. 조부모상까지 겹쳐 8년간 계속 상을 치르다가 척추 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기도 하였다. 동생과 두 자매를 데리고 가평 잠곡으로 들어가 농사지으면서 결손 가장 노릇을 하였다. 숯을 구워 서울까지 와서 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44세에서야 처음 현감 벼슬을 받았다. 대자연 재난의 영향으로 명과 청이 싸우는 격동 속에 나라의 명운을 걸고 청나라를 1회,명나라를 2회 다녀왔다. 그 덕분에 백성 살리기를 과감하게 진행시켜야 나라가 견딜 수 있다는 안민익국(安民益國)이 그의 신념이 되었다.

그는 1623년 음성현감으로서 민생고의 원인과 이의 타개책을 파악 · 연구한 음성현 진폐소(陳弊疏)를 인조에게 올렸다. 그는 2개 면만으로 구성된 작은 고을 음성현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큰 고을 충주의 땅 일부를 떼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고을의 구역은 선대에서 정한 것이라 하여 누구도 고치기를 꺼려했는데 그는 작은 고을의 억울한 삶을 구하기 위해 금단의 문을 밀었다. 고을의 재정도 개별 책임제라 옆 고을에 기근이 들어도 구호 곡식을 보낼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제도였다. 그는 이런 어리석은 관례를 깨는 데 앞장섰다. 그의 최대 업적인 대동법의 시행도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이었다. 대동법은 관청 경비조로 현물로 받던 공물을 경작지 면적(결)에 따라 쌀이나 면포로 내게 한 것이다.
[인문학 산책] 小氷期(소빙기) … 틀을 깨는 경제재상이 필요하다



대동법은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이미 시행 중이었지만,두 지역의 비중이 대단치 않아 국가 재정에 별 보탬이 안됐다. 효종 때 충청도에 시행함으로써 비로소 이 제도는 국가의 신성장 동력의 구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성과는 전적으로 그의 힘이었다. 그는 이때 재상으로서 만만치 않은 반대론을 논변으로 물리쳤다. 전라도 시행 안을 모두 만들어 놓았을 때 죽음이 찾아와 이를 시행할 최적의 인물을 유언으로 추천할 정도로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대동법은 부과의 공정성,중간착취 배제의 효과뿐만 아니라 국가가 보유하는 쌀과 면포의 양을 늘려 빈발하는 기근에 대한 국가적 대응력을 높이는 부가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 법을 시행하면서,평년작 이상을 낸 고을의 대동미를 서울로 다 가져오지 않고 일부를 흉년이 든 고을에 직송하는 운영방식을 도입했다. 이러한 탄력적 대응이 끊임없는 기근과 전란으로 무너져 가던 조선왕조를 살려냈던 것이다. 대국 명나라는 이 같은 탄력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조세의 금납화를 먼저 달성해 놓고도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넘기 전에 자체 균열을 일으켜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육은 대동법 본격 시행과 거의 시기를 같이 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주장했다. 쌀과 면포는 현물로써 먹고 입는데 실제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통체계는 경제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으로 판단해 화폐 사용을 역설했던 것이다. 화폐가 통용되어 상공업이 더 발달하면 백성들에게 생업의 기회를 더 제공할 수 있고 나라는 새로운 세원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제안으로 화폐 제도를 먼저 도입한 황해,평안 양도는 18세기에 신흥 부강도가 되었다.

대동법의 시행과 금속화폐 통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계의 설명에는 소빙기의 자연재난이 없었다. 성리학에서 실학으로 사고가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로만 설명하였다. 그래서 김육은 제안자로만 알려졌지 그에게 대재난과 싸운 각고의 노력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다. 역사 속에 실재한 위대한 리더십을 찾아 내려면 역사가들의 안목부터 달라져야 한다. 김육과 같은 경제 전문 재상의 발견만 해도 우리에게 눈앞의 경제위기를 돌파할 자신감을 심어주지 않는가.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