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음악 아티스트들의 기자 간담회는 의외로 썰렁(?)한 경우가 많다. 아티스트 측에서 미리 질문에 제한을 두거나,그 아티스트가 너무 유명해서 기자들에게 새로운 질문거리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때문에 사진 취재 경쟁은 치열하지만 막상 질의응답 시간이 되면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일쑤다. 영어 동시통역사 태인영씨(35)는 이런 자리에서 구원투수와 같은 존재다. 기자들을 대신해 유창한 영어로 아티스트에게서 예상 외의 정보를 끌어내기도 하고,재치있는 한국어로 경직돼 있는 간담회장 분위기를 풀어주기도 한다. 태씨는 그런 자신을 '트랜스레이터(translater)'나 '인터프리터(interpreter)'가 아니라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로 불리기를 희망한다. 단순히 언어를 바꿔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씨는 1999년 아리랑TV 공채MC 1기로 본격적인 방송활동을 시작해 KBS 뉴스,CNN 동시통역과 EBS '월드리포트' 등 국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통역사로 활동했지만 자타가 인정하는 그의 전문 분야는 공연이다. 내로라하는 해외 정상급 아티스트들이 내한했을 때 항상 태씨가 그들 곁에 있었다. 그가 통역을 맡았던 아티스트 중에는 마이클 잭슨,루치아노 파바로티,웨스트라이프,플라시도 도밍고 등 세계적 스타가 포함돼 있다. 4년 전까지 348명을 통역했고 그 이후에는 세는 것을 아예 포기할 정도로 많은 스타들의 '입'이 돼 줬다.



▶동시통역사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대학교 2학년 때 KBS 주최 '팝송 노래 자랑 콘테스트'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제 영어 발음을 듣고서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시켜줬어요. 그때 제가 통역한 사람이 그리스 출신의 뉴에이지 뮤지션 야니였어요. 그 이후로 계속해서 통역 일이 들어왔고 전문성을 쌓았죠."

▶전문적인 통역 공부를 한 적은 없나요?

"동시통역사는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아요. 통역대학원을 졸업하는 경우도 많지만 저처럼 업계에서 우연히 실력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죠.저는 아버지 직장 때문에 초등학교 6년을 말레이시아에서 자랐어요. 거기서 영어를 배운 덕을 많이 봤죠.물론 한국에 돌아와서도 영어 공부는 꾸준히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일주일에 한 권은 영어 책을 읽었고,웬만한 팝송은 모조리 가사를 외웠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를 공부가 아니라 생활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배우의 최근 소식이 궁금해서 영어 잡지를 읽었고,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팝송을 들었던 거죠."

▶자격증이 없다면 동시통역사로 인정받는 기준은 어떻게 정해집니까?

"글쎄요. 저도 처음엔 제가 동시통역사인 줄 몰랐어요. 그냥 영어를 남들보다 잘해서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방송 뉴스에서 실시간으로 영어를 통역하고 각종 세미나에 불려다니는 저를 보고 배유정씨가 '당신이 하는 일이 동시통역'이라고 하더군요. 내 영어실력이 다른 사람들의 전문적인 직업세계에서 인정받는다면 그게 동시통역사로 인정받는 첫 번째 기준일 거예요. "

▶태인영씨의 어떤 부분이 공연계에서 인정받았습니까?

"우선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요. 어렸을 때 클래식 기타를 8년이나 배웠을 정도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음반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요. 워낙 다른 사람들보다 음악에 관한 상식이 풍부하다 보니 통역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할 수 있는 거죠.특히 아티스트들은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음악세계를 알아주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세계 정상에 선 사람들이 가진 삶의 자세나 습관 등을 옆에서 관찰하면서 제가 배우는 점도 많거든요. "

▶기억에 남는 아티스트가 있습니까?

"마이클 잭슨요.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은 늘 똑같은 의상과 노래,안무로 무대에 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의 리허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정말 열심히 연습해요. 실제 공연보다 리허설 무대에서 더 땀을 많이 흘릴 정도로 말이죠.당시 한국 가수들이 객원으로 초대받았는데 오히려 그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

▶ 친해진 팝스타도 있을 것 같은데요?

"(주저없이)웨스트라이프요. 내한 공연 때 하루종일 붙어다니면서 통역을 했거든요. 세계적인 스타라서 도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 귀엽고 순진한 남동생들 같았어요. 수줍음도 많았고요. 그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저도 팬이 돼 버렸죠."

▶굳이 자신을 '커뮤니케이터'라고 말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저는 리처드 막스가 내한했을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당시 국내 방송사에서 복장 규제를 엄격하게 하던 시기였는데,마침 리처드 막스가 한 쪽 귀에 귀고리를 달고 있었어요. 담당 PD가 귀고리를 빼면 좋겠다고 하니 그를 초청한 음반회사 직원은 그 말을 전후 설명없이 그대로 전달했어요. 당연히 리처드 막스는 방송 출연을 안 하겠다고 했죠.게다가 자신을 게이로 오인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까지 했고요. 그때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리처드 막스에게 가서 당시 국내 방송계의 상황을 설명했죠.그런 오해들은 음반회사 직원이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에요. 통역만 했지 소통을 시켜주지 못했던 거죠."

▶경력이 특이합니다. 대원외고를 나와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단국대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도 공부하셨죠?

"대학 입학까지는 그냥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진로를 결정한 거였어요. 하지만 동시통역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전문성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연은 제가 워낙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동시통역의 영역을 넓혀가다 보니 제 상식의 한계가 느껴졌어요. 특히 동시통역은 국가 간의 정치,경제가 얽혀 있는 자리에서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사에 관련한 지식이 필수적이죠."

▶외국어권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이 동시통역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선 단순히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동시통역사로서 '성공'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해요. 그렇다면 영어는 기본이에요. 영어를 기본적으로 하되 자신의 전문 분야를 찾는 게 최대 과제인 거죠.저처럼 공연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도 있고,혹은 정치 · 과학 · 경제 등 수많은 분야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도 있죠."

▶앞으로의 목표는 뭔가요?

"최근 2년 전부터 동시통역에서 더 나아간 일을 시작했어요. 굳이 용어를 붙이자면 '협상가'라고 해야 할까요? 국제적인 비즈니스를 다루는 기업에서 상대방과의 대화가 잘 안 풀릴 때 저를 부르더라고요. 처음엔 단순히 통역 업무를 위해 따라나섰다가 요즘은 법무팀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저를 고용한 회사의 의사가 최대한 관철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소통'의 정수라고 할 수 있죠.그래서 요즘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분야는 영어가 아니라 심리학이에요. "


박신영/김병언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