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晏子)가 초(楚)에 사신으로 갔다. 초왕이 그를 접견하고 이렇게 빈정댔다. "그대 같은 자가 사신으로 오다니,그 나라에는 사람이 없나 보군." 안자가 답했다. "상대국 군주가 현명하면 현명한 자를,아둔하면 어리석은 자를 사신으로 가려 보내는 것이 우리 원칙이다. 그래서 초에는 본국에서 가장 불초한 내가 사신으로 오게 된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관중(管仲)과 함께 제(齊)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안자(?~BC500년)가 특사 임무를 띠고 초에 갔을때 있었던 3대 에피소드 중의 하나다. 초왕은 6척(138㎝)도 안되는 작은 키에 볼품없는 안자를 골려 주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안자의 발랄한 언변에 오히려 당하기만 하고, 결국에는 "성인은 희롱해선 안되는 것이로구나(聖人非所與熙也)"라며 항복 선언을 한다. 두 사람의 대결 기사는 안자가 죽은후 그의 언행을 집록한《안자춘추(晏子春秋)》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역사 인물로서 안자의 트레이드마크는 뭐니뭐니해도 대단히 검소한 청빈 재상이라는 점에 있다. "안자는 절약과 검소,근면이 뛰어나 중용됐으며 재상이 된 후에도 두가지 고기반찬을 올리지 않고 처첩은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사기관안열전(管晏列傳)》)《공자가어》에는 제자 자공이 "안자가 지나치게 검소한것은 허물이 아닌가?"라고 묻자 공자가 정색을 하며 안자를 이렇게 칭찬하는 대목이있다.

"안자는 조상 제사를 지낼때 돼지고기로 작은 제기를 다 덮지 못했으며, 여우털 갖옷 한 벌을 30년 이상 입었다(豚肩不掩豆一狐求衣三十年). 남위에 있으면서 이렇게 낮추기도 어려운 것이니,안자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윗사람을 핍박하지 않았다."

하루는 재상 집에 끼니가 떨어졌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경공은 식읍을 주고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도록 배려했지만, 안자는 세번이나 거푸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자:제집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미 왕이 주시는 것 만으로 친족이 덕을 입고 있으며, 그덕이 친구에게 까지미치고 백성들 진휼에도 쓸수있습니다.

경공:100여년 전 관중은 환공이 주는 식읍 500호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대는 왜 마다 하는가?

안자:성인도 천가지 생각중에 한번 실수할 때가 있고 아둔한 자도 천 가지 생각중에 한 번은 반드시 얻는다(聖人千慮必有一失愚人千慮必有一得)고 합니다. 제 생각에 관중은 한 번 실수한 쪽이고, 저는 한가지를 겨우얻은 것이 아닐까요.

《안자춘추》의 다른 기사에는 그에게 의탁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500여가(家)나 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두루 돌보다보니 자신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요새 말로만 요란하게떠드는 참부자의 내용이 바로 안자가 아닌가 한다. 세상이 다 배불러야 내 배도 부르다는 넉넉한 보편주의가 중국에서는 2500년전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 며칠 안자의 어록중에 '군자는 말로써 선물하고, 소인은 재물을 선물한다(君子贈人以言庶人贈人以財)'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수년 전 국세청장과 차장 사이에 유화 한 점을 선물했다, 안했다를 놓고 벌이는 입씨름 때문이다. 이 사회의 지도급 인사끼리니까 소인의 재물과는 차별되는 고상한 그림을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으
나, 선물의 배경이 인사청탁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포장해도 뇌물이다. 화가의 예술성과 그림의 작품성은 제쳐 두고 '3000만원은 간다'는 작품 가격에만 누구나 관심을 쏟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쯤 되면 요절한 화가가 저승에서 통곡할 노릇이지만, 이승에 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야하는 현실이 영 갑갑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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