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결정권 존중" vs "가정 붕괴 촉진"

"부인의 인격권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고려하면 당연히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성관계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부부 관계에서 강간죄가 성립되면 다른 목적을 위해 악용될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위기에 처한 가정의 붕괴를 촉진할 수 있다"
부부간 강간죄를 인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부부강간을 인정하자는 쪽에서는 '법이 가정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전통적 관념은 시대에 뒤진 낡은 개념이며 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정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그런 주장의 근거로 일본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이 부부강간을 인정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유엔인권위원회도 1999년 한국에서 부부강간이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데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등 부부간 강간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라는 것이다.

요컨대 부인을 성폭행하는 문제는 더이상 부부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게 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혼은 성관계에 대해 영원히 동의하는 것을 의미는 계약이기 때문에 이를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민법상 동거의 의무, 즉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논거로 들고 있다.

또 부부 강간죄가 성립되면 이혼이나 보복, 재산분할 등의 목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남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위태로운 상태의 가정을 화해시키기 보다는 붕괴로 몰아갈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사단법인 부산여성의전화 오영란 대표는 "부부간의 일을 사소한 가정사로 취급하는 구시대적 통념 때문에 부부강간죄 도입이 무산돼 왔지만 이번 부산지법의 판결로 강제적인 부부간 성관계를 폭력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환영했다.

이런 논의는 2005년 5월 열린우리당 의원 18명이 배우자 강제에 의한 성관계를 가정폭력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한 때 활발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는 개정안의 무거운 처벌규정을 문제삼으며 "특수강간죄에 준하는 중한 처벌수위는 부부 재결합이나 원만한 합의, 자녀양육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며 부부강간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부산연합뉴스) 박창수 기자 pc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