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아내 성폭행 40대에 집행유예 선고
"보호 대상은 여성 정조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부부간 성행위에 대해 강간 혐의를 인정한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부인을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한 적은 있지만, 강간죄를 적용한 사례는 없어 논란이 예상된다.

부산지법 제5형사부(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16일 필리핀인 아내(25)를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특수강간)로 기소된 L(42.회사원) 씨에 대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고국과 가족을 떠나 오로지 피고인만 믿고 온 타국에서 언어까지 통하지 않아 힘든 처지에 놓인 피해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야 함에도 갖은 고초를 겪게 하고 부당한 욕구를 충족하려 정당한 성적 자기 결정권 행사를 무시하고 흉기로 위협한 점은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시했다.

또 법원은 "형법상 강간죄의 대상인 '부녀'에 '혼인 중인 부녀'가 제외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법이 강간죄로 보호하려는 대상은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이며 아내 또한 이런 권리가 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가스총과 과도로 피해자를 위협해 성관계를 가진 죄질로 볼 때 엄벌해야 하지만 범행을 모두 시인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점, 피해자 역시 적절한 의사소통 노력을 게을리 한 점 등을 고려해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L씨는 결혼정보회사의 소개로 2006년 8월 필리핀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한 후 4개월간 동거하면서 2008년 7월 부인이 생리 중이라며 성관계를 거부하자 흉기로 위협,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1970년 대법원이 부부간 강간죄 성립을 부정한 이후 2004년 서울중앙지법이 이혼 위기에 있는 부인을 성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한 적은 있지만, 그동안 부부간 강제 성행위에 대해 강간죄를 적용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현재 법조계에서는 강간죄로 보호하려는 것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면 이는 부부간에도 당연히 적용돼야 한다는 찬성론이 있는 반면 부부관계의 특수성과 민법상 동거의 의무, 즉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해야한다는 의무 등을 내세워 피해자의 승낙 여부에 따른 강간죄 적용은 무리라는 반론이 팽팽한 상황이다.

L씨는 성폭행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국제결혼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법원의 판결에 불복, 즉각 항소했다.

(부산연합뉴스) 박창수 기자 pc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