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 이익만 좇으면 장사꾼
멀리 보고 씨뿌릴 줄 알아야

"국정을 기록하시는 사관어른께서 이 미천한 장사꾼을 어찌 찾아 오셨습니까. "가포(稼圃) 임상옥의 얼굴은 평온했다. 과연 조선 최고의 거부에서 채소를 가꾸는 늙은이로 변해 상불(商佛)을 이룬 부처의 모습이었다. 멀리 미국에서 불어온 금융위기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경제가 온통 불확실성에 휩싸인 혼란의 시대.100여년 전 이미 상업의 길(商道)을 깨우친 거상 임상옥에게 무언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선 길이었다. 임상옥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듯 짐짓 딴청을 피웠지만 삶의 지혜를 담은 눈빛만은 숨길 수 없었다.


▼대인어른께서 미천하시다니요. 대인어른께서 살았던 조선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기업가들을 가장 중히 여기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어허.과연 그런가요. 참 반가운 말입니다. 하지만 그 뿌리 깊은 사농공상의 인식이 불과 150여년 만에 사라졌다는 말은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가끔 이승의 삶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상인들에 대한 조정의 간섭이 복잡다단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 같습디다. "


▼조정의 간섭은 여전히 많지만 150여년 전만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너무 간섭을 안 해 미국이란 대국에서 금융대란이 터진 게 아니겠습니까.

"아,그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찌 조정의 간섭이 적어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인간들의 과도한 욕심이 빚어낸 일이겠지요. 사관어른께선 제가 큰스님에게 물려받아 평생을 간직한 '계영배(戒盈杯)'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요?"


▼가득 채우면 술이 모두 사라지고 7부만 채우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그 신기(神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가득 채움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뜻의 그 계영배 말입니다. 금강사에서 큰스님인 석숭 스님이 제가 당하게 될 세 번째 위기를 피하게 해줄 것이라며 내어준 그 잔이 저를 조선 최대의 거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쾌락,명예,소유,집착,애욕은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그런 욕심들을 모두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곤경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이란 대국의 월스트리트라고 했던가요? 그 먼나라 사람들이 '모든 불행은 스스로 만족함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는 계영배의 가르침을 알았다면 전 세계가 이렇게 큰 탈이 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그리도 사랑했던 여인과 생이별을 하고 때만 되면 곳간 문을 열어 이웃에 나눠 줬던 것도 가득 채움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죠."


▼그렇지만 지금의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의 욕심일 터인데요.

"그렇죠.저도 욕심이 있었습니다. 욕심이 없었다면 저도 금강사에서 승복을 입은 채 평생을 보냈을 겁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만족할 줄 알아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조선왕조를 뒤집으려고 했던 홍경래라는 자가 저를 혁명단에 끌어들이려 한 일을 알고 계시죠? 제가 그 때 추사 김정희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아마 '삼족이 멸하는 화(三族滅門之禍)'를 입었을 겁니다. 저는 권력과 명예와 재물,세 가지 욕심을 모두 채우려고 하면 결국 화를 입게 될 것을 깨달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만 끝나면 가족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는 것도 모두 이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인 듯합니다. 하지만 욕심만 내려 놓는다고 요즘 같은 난세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긴 합니다. 사관어른은 제 인생의 첫 번째 위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


▼알다마다요. 대인어른께서 인삼값을 크게 올리자 청나라 상인들이 불매동맹(不買同盟)을 맺었던 때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 때 베이징에 함께 갔던 추사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척간두에 올라서 꼼짝없이 죽게 된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고요. 저는 청나라 상인들이 불만을 가졌던 한 근당 은자 40냥의 인삼 가격을 오히려 45냥으로 올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귀한 인삼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자 상인들은 오히려 내 다리를 붙들며 매달렸고 그 일로 저는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


▼마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1995년 품질 경영을 위해 휴대폰 500억원어치를 모두 불태워버렸던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허허허.그 어른께서도 저만큼이나 절박하셨던 모양입니다. 1821년 제가 태운 인삼은 제 생명과 같았습니다. 저는 저를 죽여서 저를 살린 셈입니다. 이건희 어른께도 휴대폰은 곧 자기 자신이었겠죠.그 어른도 백척간두에서 죽을 각오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지금 세계 2위의 휴대폰업체를 일궈낼 수 있었을 겁니다. "


▼이런 난세에 그런 기업가가 또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기업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곽산군수를 지냈던 1832년 설날,세 명의 나그네가 저를 찾아와 돈을 꾸어 달라고 했죠.시험 삼아 각각 한 냥씩 빌려줬더니 한 명은 짚신을 만들어 팔아 한 냥을 남겨왔습디다. 또 한 명은 대나무와 창호지로 종이연을 만들어 두 냥을 남겨 왔고요. 나머지 한 명은 술을 마시고 놀다가 엉뚱한 방법으로 열 냥을 벌어 왔습니다. 저는 마지막 사람에게 1년 후에 갚으라며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줬습니다. 그 자는 6년 후 열 바리(소 달구지에 한 가득 실은 양)나 되는 인삼을 갖고 나타났죠.술을 마시다 남은 돈으로 인삼 씨를 사서 태백산 인근에 뿌려놓고 6년 동안 술만 마시다가 말입니다. 허허허."


▼어찌 부지런한 사람보다 술이나 퍼마신 자에게 더 많은 돈을 투자하셨습니까.

"짚신을 만들어 한 냥을 남겨온 사람은 상업보다 농업에 맞는 사람입니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판 난다는 건 농사꾼의 철학이죠.그런 사람은 큰 돈을 벌지 못합니다. 설날 대목에 연을 만든 사람은 때를 잘 살필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자는 눈앞에 이익만 살피는 자입니다. 현상을 좇아다니다 제 꾀에 넘어가는 유형이죠.큰 장사꾼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우산을 만들고 나막신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큰 장사꾼은 최소한 5년 후의 장래를 내다보고 대책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장사꾼은 비록 술과 계집에 빠진 난봉꾼이긴 했지만 6년 뒤를 내다보고 인삼씨를 구해다 태백산 심심산중에 뿌림으로써 10만냥이라는 거금을 얻을 수 었었던 겁니다. "


▼과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미래를 내다보고 씨앗을 뿌려둬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눈치가 빠르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큰 부자는 이 같은 난세에 자신만 혼자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살던 의주에 큰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돌았을 때 곳간문을 활짝 열어 곡식과 돈을 풀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채무자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금덩어리와 은덩어리도 모두 나눠줬죠.지금 한국의 은행들이나 대기업들도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하라'는 경주 최부자댁의 가훈을 새겨 들어야 할 겁니다. 그것이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즉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는 저의 가장 중요한 상업 철학이지요. 금을 쌓아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적금후사우하심 · 積金候死愚何甚)."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도움말 주신분=권명중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참고문헌=상도(최인호 저),거상 임상옥의 상도경영(권명중 저),임상옥 평전(문일평 저),조선거상 임상옥과 중국거상 호설암의 기업가정신(박유영 저),겨레의 인걸 100인(윤승운 저)


● 임상옥은 누구인가

가포 임상옥은 정조 20년인 1796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조선 후기의 무역상이다. 지난 2000년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지만,그의 사무실에서 회계를 맡아보는 사람이 70명이 넘었을 만큼 거상(巨商)이었다고 전해진다. 임상옥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번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도 "임상옥 같은 비천한 상인을 귀성부사로 임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변사들의 논척뿐이었다. 구한말의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문일평이 임상옥에 대해 서너 장짜리 평전을 남긴 게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임상옥은 정조 3년인 177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상업자본이 성장하면서 민간상업이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임상옥은 이 같은 시대 상황에서 신흥 상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30세에 이미 거부로 성장했다. 순조 10년인 1810년에는 이조판서 박종경의 정치적 배경을 이용해 국경지대에서 인삼무역 독점권을 확보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1821년 변무사를 수행해 청나라에 갔을 때는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하게 깨뜨리고 인삼을 원가의 수십 배에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수재민 등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했다. 모든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등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사람과 신용을 중요하게 여긴 상인이기도 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임상옥은 서민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1832년 관산군수,1835년 귀성부사에 발탁됐다. 그러나 비변사들의 논척을 받고 사퇴한 후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내다 1855년 생을 마감했다.

● 연보

△1779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
△1796년 상업 시작
△1810년 국경지대 인삼무역독점권 확보
△1821년 청나라 상인들의 불매동맹 극복
△1832년 곽산군수
△1835년 귀성부사
△185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