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그곳에 불러들였을 뿐
"사람은 관뚜껑 닫힐 때까지 배워야돼… 지식은 쌓으란 게 아니고 자신이 어디에 집착하고 있는지
계속 경계하란 말이지… 집착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피곤해져"

송기홍 법무법인 한승 대표변호사(66)는 법조계에서 '살아있는 부처'로 통한다. 고희(古稀)를 눈앞에 뒀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童顔).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소탈함과 인자함.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법원도서관장,서울가정법원장 등 요직을 거쳤음에도 "운이 좋았고 그저 뚜벅뚜벅 걸었을 뿐"이라고 회상하는 겸손함.그리고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선문답' 때문이다. 송 변호사는 참선 불교신자다. 가족 및 지인의 행운을 기원하는 기복불교가 아닌 '자아와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불교다. 선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불교신자가 됐지만 본격적으로 참선을 시작한 지는 이제 10년이 지났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모 법당의 스님 밑에서다.

송 변호사는 간화선(看話禪) 혹은 화두선(話頭禪)이라는 참선을 한다.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깨달음을 구하는 참선 방법으로,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구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경전을 평생 읽어도 시간이 모자란거라.어차피 깨닫는 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라면 굳이 말씀에 구애될 필요가 있고 말씀을 세울 필요 있나요(不立文子 不拘文字).그 맥락이 화두선입니다. "

송 변호사는 형사사건 법정에 선 피고인을 '거짓말하는 부처',변호인을 '이에 부화뇌동하는 부처',검사를 '추궁하는 부처',판사를 '결정하는 부처'라고 말했다. 다만 인연에 따라 한자리에 모여 모습(容)이 달리 나타나고 있을 뿐 모두가 부처라는 것이다.

"판사하고 피고인하고 똑같은 부처라는 것은 말장난 아닙니까"라고 짐짓 이의를 제기하니 "서로 그런 역할과 작용을 할 뿐 높낮이는 없다"고 대답했다.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질러도 부처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당연합니다. 다만 인연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나지막하게 응수했다.

송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축제에서 법대생으로는 처음으로 바이올린 솔로를 켜기도 했다. 음악이 좋아서 배우자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택했다. 송 변호사의 부인은 과거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두 딸도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딸들이 손녀에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동시에 가르쳐주고 있다고 한다. "음악은 자유를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그래서 불교랑 통해요. 사실 '건달'이란 말은 인도신화에 나오는 '음악을 맡은 요정'이란 뜻의 산스크리트어 '건달바(乾達婆.Gandharva)'에서 나왔어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성이 주체를 못하는 거지요. "

그는 '인생은 긴 꿈'이라고도 정의했다. 32년 판사 생활 소회에 대해서는 "재미도 별로 없었고,별게 아니더라고요.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남들이 이런 말하면 배 부른 소리라 하겠지.그런데 어떤 것이 확실히 있다고 여기면 그때부터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생겨요. 중요한 감투 쓰고 싶고 좋은 데서 일하고 싶고.그게 바로 집착이에요. 그런데 일을 개판치라는 것은 절대 아니고.허무주의에 빠지라는 것도 아닙니다. 아웅다웅하지 말고 바로 여기,지금(卽時卽處) 최선을 다하란 얘기입니다. "

1942년 일본에서 태어나 세살 때인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으로 건너왔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중학시절까지 보내고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판사로 임관한 후 27년간을 '소총수(재판만을 하는 판사)'로 보냈다. 이후 법원도서관장 시절에는 종합법률정보시스템 구축을 주도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지식 파급에 따른 정보 독점이 깨지는 것을 우려했지만 그는 밀어붙였다. 가정법원장 시절에는 이혼시 남녀가 재산을 5 대 5로 분할하는 것에 대한 판례를 정립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라고 본 것이다. '집착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2시간에 걸친 선문답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려 할 때 송 변호사가 또하나의 화두를 건넸다. "젊은 기자 양반하고 만난 것도 인연인데.인연은 근본 자리에서 보면 만난 적이 없어요. 환상일 뿐이지.사람에 대한 집착과 고통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할 때 생기지. 구애받지 않으면 돼.연꽃은 진흙탕에서 피는데 진흙이 묻지 않아요."

이해성 기자/김병언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