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장마라더니,태양 볕이 너무 강해 움직이고픈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딸 아이는 워킹 맘에게는 야속하게도 이미 6월 초에 이른 방학에 들어갔다. 6월에는 그나마 다닐 만한 날씨였는데,지금은 그저 집에서 에어컨 틀어 놓고 TV를 보며 시원한 과일이나 즐기고픈 마음뿐이다. 어른 마음이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햇볕 쨍쨍한 여름 날씨에 신이 난 아이는 아랑곳 않고 나들이를 재촉해댄다. 실내 활동 위주의 장소들은 비 오는 날마다 이미 다 섭렵했으니,더위 속 여행길이 짜증나지 않을 정도인 가까운 야외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부모님과 가끔 보냈던 여름 휴가가 떠올랐다. 계곡물이 흐르는 산 밑을 찾아,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도시락이며 과일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함께했던 추억.차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청계산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늦은 오후에 집을 나섰다.

식당들이 워낙 많고 등산객들의 왕래도 잦아 한적하고 시원한 곳을 찾기가 그리 쉬운 곳은 아니다. 차로 몇십 분을 돌다 보니 근방에 식물원 표지판이 보여 우연찮게 신구대학 식물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꽤 넓은 면적에 테마별로 멋지게 정원을 꾸며 놓은 데다 곤충을 관찰할 수 있는 곳,나무 놀이터,산책로 등 한두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입장료도 없고 잡상인도 없는 말 그대로 식물원 그 자체다. 나무와 꽃의 향내에 취해 푸르름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찍다 보니 어느 새 식물원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다시 차로 10분을 달려 청계산 입구에 식당들이 즐비한 곳으로 옮겼다.

야외에 나와 간단하게 냉면 정도만 먹기엔 너무 서운하고,탕이나 고기를 구워 먹기엔 그 열기가 버겁다. 그래서 결정한 메뉴가 바로 오리 훈제 바비큐다. 산 밑에 있는 식당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비슷한 메뉴들로 구성돼 있어 식당을 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 가운데 '산하가든'(031-752-9922)은 밑반찬이 맛있기로 입소문이 난 곳이다. 참나무 숯가마에서 30분간 익혀 나와 기름기도 적고 쫀득한 오리는 불의 향 때문인지 훈제 요리 느낌이 강하다. 그대로 먹어도 좋고 테이블 위에 불을 지펴 더 뜨겁게 구워 가며 먹어도 된다. 고기야 다 비슷하지만 고기와 함께 내는 양파 장아찌,깻잎 절임,그리고 잘 씻어 나온 묵은지가 일품이다. 모양새는 그저 그래도 맛은 진국이다. 고기를 싸서 먹거나 밥만 싸 먹어도 개운하다. 평상을 깔아 놓은 테이블 밑에는 개울이 흐르고 대형 선풍기를 틀어 놓아 자연의 바람을 담아 내는 느낌에 시원한 저녁을 만끽한다. 오리 바비큐 한 마리가 3만5000원인데 세 명이 너끈히 먹을 양이다.

서양인들도 무더운 날씨에 입맛을 잃으면 훈제 고기를 차갑게 해서 샐러드와 즐기곤 한다. 불포화 지방이라 그나마 콜레스테롤 걱정이 덜한 훈제 오리는 여름철 단백질 공급원이자 더위 걱정을 덜어주는 음식이다. 이런 훈제 오리에는 어떤 와인이 좋은 궁합을 이룰까? 지방이 두툼하고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과 선홍색 쫀득거리는 살이 분명 고기다. 하지만 양고기나 쇠고기처럼 강한 느낌이 아닌 가금류여서 오크통에서 숙성된 헤비한 화이트 와인도 어울리겠고,무겁지 않으면서 우아한 중간 보디의 레드 와인도 고기 맛을 더 잘 살려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와인은 이탈리아산 레드 와인.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와인 생산지인 움브리아의 룽가로티 제품이다. 와인과 올리브 오일에 관한 한 매우 유명한 생산자여서 품질도 안심이 된다. 산지오베세(Sangiovese),카나이올로(Canaiolo) 등 이탈리아 토종 포도가 섞인 '룽가로티 루베스코'(Lungarotti Rubesco)는 진한 석류색에 비해 타닌이 부드러운 우아함을 지녔다. 산도도 어느 정도 들어 있어 기름기 많은 고기에 제격이고,여름에는 약간은 차게 해서 마셔도 좋다.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아 가볍게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즐겨보자. /음식문화 컨설턴트 toptable22@naver.com

사진=김진화 푸드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