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엔 오래 전부터 소재에 대한 금기 사항이 있었다.특히 1980,90년대에 이 금기 사항은 거의 절대적이었다.아이나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영구와 땡칠이' 같은 아동용 영화가 아닌 대중 상업 영화를 대상으로 할 때),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그리고 장애우가 주인공인 영화는 흥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영화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이러한 소재의 영화를 1980,90년대 한국 영화에선 거의 볼 수 없다.당시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인 영화를 꼽으라면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한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정도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한국 영화는 금기를 과감히 깨며 흥행에도 성공한다.첫 번째 주자가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다.산골을 배경으로 손자와 할머니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촬영될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게다가 개봉을 앞두고도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인가에 대해선 다들 갸우뚱거렸다.하지만 관객들은 충무로의 금기에 반기를 들며 '집으로…'에 손을 들어 줬다.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김을분 할머니와 아역 유승호는 '국민 할머니와 손자'가 됐다.

그 해 여름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장애우에 대한 금기를 깨 주었다.전과자와 장애우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정성에 관객들은 박수를 쳤다.여배우임에도 장애우 역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보여준 문소리는 그 해 각종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이후 2005년엔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이 금기 사항 중 두 가지를 단박에 깨 버린다.스포츠와 장애우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라는 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으며 장애우 역을 맡았던 조승우는 이미지가 더욱 좋아져 각종 CF에 등장했다.실제 장애우를 소재로 한 '맨발의 기봉이'(2006)도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동성애가 근간이 된 '왕의 남자'(2005)는 조용히 개봉해 점점 스크린 수를 늘려가며 1000만 관객을 넘겼고 이준기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그리고 2008년 핸드볼을 소재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전국 관객 400만명을 넘기며 위기의 한국 영화에 단비를 내려 줬다.스포츠 케이블 채널에서는 영화의 성공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여자부 핸드볼 경기를 다시 보여주기도 했다.임순례 감독은 실력 있는 감독에서 흥행 감독이 됐다.물론 좋은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들 영화의 면모를 잘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영화적 재미와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다는 점이다.그리고 그 안에 사람,즉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2000년대 관객들은 소재가 무엇이든 영화를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원한다.그나마 감동이 없다면 재미라도 줘야 극장을 찾는다.결국 흥행 여부는 소재가 아니라 얼마나 잘 만들었느냐에 달려 있다.얼마 전 200만명을 넘긴 '추격자'도 1급 스타 한 명 등장하지 않지만 잘 만든 영화의 힘만으로 흥행 질주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원 영화칼럼니스트 latehop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