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배우는 데도 단계가 있다.

처음엔 단맛,신맛,쓴맛(타닌) 등 와인에 담긴 기본적인 맛을 구분하고 다음엔 와인의 주재료인 포도 품종별로 각각의 특성을 음미해 나가는 게 일반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생산 지역과 빈티지(vintage,포도 수확연도)라는 변수를 추가할 수 있다.

같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란 품종이라도 보르도산(産)이냐,칠레산이냐에 따라 맛이 다르고,빈티지별로도 맛의 차이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단계별 와인 시음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품종을 알아두는 일이다.

품종만 꿰고 있어도 와인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는 일이 한결 쉬워진다.

"지난번엔 메를로를 주로 마셨으니까 오늘은 피노 누아를 마셔볼까? 소믈리에가 피노 누아로 만든 것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주세요"라는 식으로.

우선 레드 와인용을 기준으로 포도 품종을 기억하는 좋은 방법은 체급별 복싱 선수를 연상하는 것이다.

라이트급,미들급,헤비급으로 분류하는 것.라이트급(light bodied) '선수'로는 보졸레 누보의 기본 재료로 쓰이는 '가메이(gamay)'와 프랑스 부르고뉴가 주산지인 피노 누아(pinot noir)'를 꼽을 수 있다.

이들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대체로 가볍고 부드러운 특성을 갖고 있다.

과일향이 뚜렷해 신맛이 강하고 타닌 성분이 많지 않아 뜨거운 여름날 야외에서 가벼운 식사와 함께 마시기에 편하다.

혈액형에 비유하면 섬세하면서도 여성스러운 'A형'스타일에 가깝다.

섞이는 것을 싫어해 '가메이''피노 누아' 모두 다른 품종과의 블렌딩 없이 100% 혼자 힘으로 와인을 만든다.

곁들이는 음식은 가벼운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파스타,피자,향이 덜 진한 치즈류와 어울린다.

중량급(midium bodied) 와인을 만드는 품종으로는 '메를로(merlot)'를 비롯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지오베제(sangiovese)',스페인의 대표 품종인 '템프라니요(tempranillo)'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와인의 특징은 '적당함'이다.

타닌,신맛,나무향 어느 것도 진하지도 흐리지도 않다.

모나지 않고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특성 덕분에 성격 좋은 'O형'을 연상시킨다.

그래서인지 다른 품종과의 블렌딩에 잘 쓰인다.

특히 성숙하고 풍만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섞여 훌륭한 보르도 특급 와인을 만들곤 한다.

슈퍼 토스칸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명품 와인들도 '산지오베제'와 '카베르네 소비뇽'의 결합품이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syrah)'는 헤비급의 '대표 선수'들이다.

신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타닌,오크향이 강하다.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관통해 코까지 이어지는 잔향(殘香)이 길게 남는다.

최근 '시라'로 만든 프랑스 론(Rhone) 지방의 샤토네프뒤파프 와인들은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 불릴 만큼 화려한 맛을 자랑하며 두터운 마니아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미국 와인 전문지인 와인 스펙테이터가 선정한 올해 100대 와인 중 1위(클로 데 파프 샤토네프뒤파프 2005)도 '시라'에서 나왔다.

혈액형으로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B'형 스타일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품종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강한 타닌 성분 때문에 '와인은 떫기만 하지 도대체 무슨 맛이야'라는 인상을 남기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흔히 '쇼 와인(show wine)'이라고 불리는 '향은 그럴 듯하지만 맛은 별로'인 변덕스러운 스타일의 와인이 이 품종들로부터 나오곤 한다.

오래 숙성된 '카베르네 소비뇽'은 와인을 열고 나서 시간을 두고 마시는 게 좋다.

곧바로 마시면 야생동물의 털에서 나는 야릇한 향이 나기 때문이다.

음식은 붉은기가 뚝뚝 떨어지는 육류와 어울린다.

따라서 더운 여름날이나 야외에서 마시기엔 부적합하다.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품종 중에선 '샤르도네(chardonnay)'가 잘 알려져 있다.

'피노 누아'가 레드 부르고뉴라면 '샤르도네'는 화이트 부르고뉴라고 불릴 만큼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품종이다.

울창한 열대 우림 속의 맛있는 과일을 바로 따서 먹는 착각에 빠져들게 할 만큼 탐스런 과일향이 강하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은 호주산이 유명하다.

정수리를 헤쳐나가는 세련되고 날카로운 신맛은 딱 기분 좋을 만한 미감을 자극하고 텁텁하지 않은 깔끔한 뒷맛은 때론 이지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초보자들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오래 접해본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마지막으로 독일과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많이 나는 '리슬링(riesling)'은 아주 달콤한 와인을 만드는 품종이다.

초보자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품종으로 적당한 당도와 향미는 와인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도움말=최해숙 와인나라아카데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