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5층 리허설 룸.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자들이 크고 작은 악기를 메고 들어선다.

까만 연주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지만 정기 연주회를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은 진지하기만 하다.

부산한 손길로 악기를 튜닝하는 단원들 사이에 영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바이올린 부수석인 마크 코몬코(33·우크라이나)와 비올라 수석인 헝웨이 황(30·대만).연주가 시작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언어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된다.

글로벌 시대에 음악시장도 예외는 아니지만 이들 외국인이 한국까지 찾아온 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

7세 때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들어간 코몬코씨는 줄곧 유럽에서 활동했다.

영국 왕립음악원과 독일 쾰른 음대를 거쳐 클래식의 본고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왔다.

그런 그가 먼 타국땅인 한국으로 온 이유는 단 한 가지.사랑 때문이었다.

"운명의 여성을 만났습니다.

4년 전 연주회가 있어 부산을 방문했을 때죠." 수줍게 입을 연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던 그의 눈에 한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고 했다.

풋풋하고 친절한 모습에 반했다.

"영어 할 줄 아느냐,나와 데이트하겠느냐고 솔직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황하던 아내 얼굴이 떠오르는군요."

코몬코씨는 귀국하자마자 독일생활을 정리했다.

주위에서는 극구 반대했으나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한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바쁘게 일할 준비도 돼 있었고요." 그는 대전시향과 인천시향에서 객원 악장을 하며 사랑의 거리를 좁혀갔다.

2년간의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서울시향의 연주자로 자리를 잡은 뒤 '음악적 완성도'도 깊어졌다.

이제 그의 곁에는 매니저이자 한국어 스승인 아내 김정화씨(25)가 있다.

비올라 수석인 황씨는'우정'을 좇아 한국에 왔다.

그가 '음악적 형제'라고 밝힌 이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한국인 데니스 김.홍콩필하모닉에서 함께 하며 음악적 교감을 쌓았다.

2006년 정명훈 예술감독을 영입한 서울시향이 데니스 김을 2인자인 새 악장으로 뽑자,황씨도 서울행을 택했다.

"누구와 함께 연주하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마음으로 통해야 좋은 연주가 나옵니다."

그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선택했지만 모든 게 잘 풀렸다.

"한국과는 궁합이 잘 맞는 모양입니다.

일과 가족,사랑까지 모든 것을 가지게 됐습니다." 누나와 매형이 한국에 사는 덕분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덜 수 있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한국인 여성도 생겼다.

오랫동안 인생을 함께 설계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살짝 귀띔했다.

서울시향의 연주자는 음악을 즐기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최고 수준의 교향악을 선보이기 위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구청과 학교 등을 찾아다니며 시민들의 행복지수도 높여야 한다.

중국 등 해외 순회 연주까지 소화하다보면 1년이 빡빡하다.

수석과 부수석으로서 각 악기파트의 연주자를 이끄는 일도 쉽지 않다.

이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바쁘고 성실하게 살려면 정말 힘들다"면서도 한국 생활이 싫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 손 끝에서 조화를 이룰 때 즐거움을 느끼죠.지난해 베토벤 교향곡 1~3번을 연주했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쉽지 않은 곡이었지만 모든 단원들이 열정적으로 몰입한다는 게 느껴졌죠." 이들에게 정명훈 예술감독은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다.

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이를 성취하는 능력도 대단하다고 입을 모은다.

코몬코씨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는 한국 관객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크라이나는 경제 상황 때문에 음악계도 최근까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빠른 성장을 이룬 한국은 음악계에서도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은 경제 수준과 같이 움직이더군요."

황씨는 인재 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그는 재능있는 젊은이가 유난히 많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도 한국을 좋은 연주자들의 요람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한국인들은 연습을 워낙 열심히 해 '어떻게 연주하는가'는 잘 알고 있죠.다만 '왜 연주하는가'는 어려워하는 학생들도 있는 듯합니다.

테크닉이 중요하지만 음악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도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10년 후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물어봤다.

코몬코씨는 아들 딸을 낳아 대가족을 이루겠다고 자신했다.

"11월에 한국에서 첫 독주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제 음악 인생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겠죠." 그는 한국을 정착지로 선택한 만큼 서울시향에서 오랫동안 하모니를 맞추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생활이 만족스러워 정착하고 싶습니다.

서울시향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소중한 기회죠. 가족과 친구가 있는 이곳을 좀더 오래 머무르고 싶습니다" 황씨는 여섯살 조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칠 시간이라며 일어섰다.

글=김유미 기자/사진=김병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