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에게 인터뷰를 신청한 것은 지난 5월 초였다.

2003년 이익 급감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소니가 작년 실적 호조로 되살아난 게 뉴스가 됐던 때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소니를 진두지휘했던 이데이 전 회장을 만나 '소니 부활'의 배경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는 소니 창립 이래 최대 실적을 올려 '가전 왕국'의 명성을 얻게 했던 간판 경영자이자 말년에 소니의 추락기도 함께 했던 인물이다.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최고 고문직이라는 타이틀로 여전히 소니에 적(籍)을 두고 있던 그는 소니 경영에 대해 얘기하길 꺼렸다.

그러던 그가 지난달 21일 소니 정기 주주총회 때 최고 고문직에서 물러났다.

47년간 몸담았던 소니를 완전히 떠난 것.5일 뒤인 26일에는 중국의 구글(google)로 불리는 인터넷 검색기업 바이두(百度)의 사외이사를 맡으면서 새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데이 전 회장은 한결 홀가분해진 듯 "그럼 만나자"며 응했다.

도쿄역 앞에 있는 그가 세운 컨설팅회사 퀀텀리프(Quantum Leaps) 사무실에서 지난 6일 이데이 전 회장을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거대 글로벌 기업 소니의 최고경영자(CEO) 출신답게 1시간여 동안 소니의 어제와 오늘부터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기업 간 협력,전자산업의 변화 방향,기업의 성공조건,삼성전자에 대한 조언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소니의 변혁 과정을 이야기하면서는 벌떡 일어나 화이트보드에 그래프 등을 그려가며 설명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chabs@hankyung.com


⊙중국 바이두 사외이사는 친구의 부탁

▶지난달 말 평생을 바친 소니의 최고 고문직을 내놓은 후 중국의 인터넷 검색기업 바이두의 사외이사로 참여했다.

일본의 대표적 경영인이 중국 인터넷 기업을 자문한다는 게 좀 의외인데….

"바이두의 로빈 리 회장이 부탁을 해와 조금 고민하다 승락한 것뿐이다. 그와는 사업관계로 아는 사이다. 엔지니어 출신인데,일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내 경험과 경륜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주기로 했다.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대표적 인터넷 업체 중 하나인 NHN도 연말께 일본의 인터넷 검색 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일본 인터넷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무엇이 중요한가.

"네티즌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인터넷은 개인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 개인들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려면 자기만의 기술이 있어야 하고,기업 이미지도 좋아야 한다. 이를 통해 일본의 커뮤니티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어느 업종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기술만 좋다고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소니가 미국 시장에 들어갈 때도 그랬다. 그 나라 소비자들의 사고 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작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느냐 여부가 나중에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초래한다."


⊙아시아 기업협력은 연성제휴로

▶최근 아시아 기업 간 협력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서,어떤 방식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많다. 아시아 정부 간에도 요즘 환경 에너지 등 분야에서 협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 않나. 그런 분야에서 기업 차원의 협력이 충분히 가능하다. 협력 방식은 연성 제휴(soft alliance)가 효율적이다. 소니와 스웨덴의 에릭슨이 50 대 50 합작회사를 만들어 휴대폰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나,소니와 삼성이 LCD패널 사업에서 합작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형태처럼 말이다. 이것은 두 기업이 인수·합병(M&A)해서 완전히 한 회사가 되는 강성 제휴(hard alliance)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서로의 본체는 유지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손을 잡는 것이다. 연성 제휴는 시간도 절약되고, 윈윈(win-win) 가능성도 높다. 조직문화나 사고 방식이 다른 기업도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다. 다른 점은 배제하고,좋은 점과 같은 점을 찾아 협력하면 된다."


⊙소비자를 즐겁게 하는게 소니의 목표

▶소니 회장 재임 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융합(컨버전스)에 주력했는데.

"융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융합이 아니라 첨가한 것이다. 소니는 기본적으로 소리(오디오)와 영상(비디오) 기기에 특화된 회사다. 내가 회장으로 있을 때 이 분야에 콘텐츠와 IT(정보기술)를 첨가한 것이다. TV,휴대용 기기 등에 IT를 접목하고 영상 음악 등의 콘텐츠를 얹은 셈이다. 시대 흐름과 소비자의 수요에 맞춘 것이었다."

▶소니의 2003년 영업이익이 절반으로 준 실적악화 쇼크에 대해선 지금도 원인 분석이 분분하다. 어떻게 평가하나.

"소니의 경영실적에 대해서는 가급적 얘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소니를 은퇴했는데,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현 경영진에 부담이 된다. 원래 졸업한 학교는 뒤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소니의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소비자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한국의 삼성과는 다른 점이다. 내가 경영할 때 영화 음악 등 콘텐츠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철저히 소비자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회사가 소니다."


⊙정부ㆍ국민ㆍ기업 간 하모니 중요

▶한국의 삼성전자는 반도체 가격 하락과 원화 강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의 경쟁력과 향후 전망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1995년 소니 사장에 취임한 이후부터 삼성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들어왔다. 개인적으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나의 와세다대학 후배이지 않나.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휴대폰,디스플레이 등에서 크게 성공한 회사다. 근데 이 3가지가 모두 변화가 매우 심한 분야라는 게 문제다. 10년 뒤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바뀔지,휴대폰이 어떻게 진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나마 삼성은 이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바꿔왔다. 지난 15년간 변혁을 해온 셈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삼성의 성공 밑거름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의 확실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는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하면서 중국의 추격을 받는 소위 '샌드위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처방은 없겠나.

"결국 기업 간 경쟁의 문제이지만 국가의 산업정책도 중요하다. 과거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친 '주식회사 한국'으로 성공했다. 일본이 '주식회사 일본'으로 성공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는 정부와 대기업이 협력하면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반발하지 않는가.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한국은 미국적인 소비 주도형 국가로 너무 빨리 변한 게 아닌가 싶다. 신용카드 산업이 일본보다 훨씬 번성하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핵심은 정부와 기업,국민이 조화(하모니)를 이뤄야 국가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산업의 성숙 단계를 지나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을지 여부도 여기에 달려 있다."


⊙기업지배구조는 정답 없어

▶일본 경제가 '10년 불황'을 딛고 일어선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크게 두 가지 요인이다. 우선 세계 경제가 회복된 것이다. 미국 유럽 등의 경제가 괜찮았다. 중동도 오일머니로 돈을 많이 벌고 있다. 중국 인도 러시아 등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세계적인 수요가 늘어난 게 일본 경제 회복의 배경이다. 일본의 상품,일본의 기술을 찾는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 기업들이 그동안 성실하게 구조조정을 한 결과다. 불황기 동안 과잉 설비 등을 구조조정한 게 다시 성장 엔진을 가동시킨 것이다."

▶일본에서도 주주 중심주의로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는 미국식 경영과 종신 고용 등 장기적 시야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일본식 경영에 대한 논란이 있다.

최근엔 두 방식의 장점을 접목한 '신(新)일본식 경영'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일본식 경영이다,미국식 경영이다' 하는 말은 신문에서 화제를 삼으려고 만들어낸 말들이다. 특정한 나라의 일정한 경영 방식은 없다고 본다. 문제는 기업 지배구조인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업의 지배구조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그 회사의 역사와 특성 등에 연결돼 있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소니를 보자.소니는 글로벌 기업이다. 거래할 때 결제 통화도 미국 달러,유로,영국 파운드,엔화 등 다양하다. 이런 회사는 결제 통화가 하나인 회사와 지배구조가 달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니는 그래서 지배구조가 글로벌식이다. 그런데도 어느 나라식 경영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사안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다. 미국식 경영이라고 하지만 제너럴모터스(GM)와 구글의 지배구조가 다르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삼성과 LG의 지배구조가 똑같다고 할 수 있나."


⊙컨설팅회사 통해 벤처기업 지원

▶작년 9월 창업한 컨설팅회사 퀀텀리프를 통해 하려는 일은.

"퀀텀리프(Quantum Leaps)란 말은 양자역학에서 '비(非) 연속의 도약'을 뜻한다. 일본과 아시아를 무대로 새로운 산업과 비즈니스를 창출해 도약하려는 기업을 돕겠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기존 경험 많은 경영자와 벤처기업가를 짝지어 주고,기술과 금융자본을 맺어주며,일본과 아시아를 연결해주는 일들을 하고 있다."

▶소니와 같은 거대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에서 작은 컨설팅회사의 경영자로 바뀌어 달라진 게 많을 텐데.

"퀀텀리프의 현재 직원은 10여명이다. 소니(직원 수 약 16만명)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작은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좋은 점도 있다. 소니를 경영할 땐 내 시간의 100%를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에 소니 이외의 것은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소니를 나와선 세상을 좀더 넓게 보게 됐다.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 간 협력이나,아시아 기업 간 협력 등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또 소니를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도 달라진 점이다."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데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퀀텀리프를 설립한 목적 중 하나도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 요즘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가서 강연도 많이 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실리콘밸리에 인도와 중국 벤처기업,벤처캐피털은 커뮤니티를 형성해 모이는데 한국 벤처기업이나 일본 벤처기업은 그런 게 약하다는 것이다. 너무 기업인 수가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커뮤니티가 있다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 좋을 것 같다."


⊙경영자 성공비결은 비전ㆍ전략ㆍ인재

▶벤처기업이 소니 같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소니가 창업한 것은 1946년이다. 당시엔 모든 게 아날로그 기술이었다. 기술 변화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아날로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런 빠른 변화에 어떻게 잘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다. 시대 변화에 맞춰 완전히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말하자만 곤충이 번데기로부터 허물을 벗어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 같은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곤충의 변태)를 기업도 해야 한다. 소니도 그동안 오디오·비디오 기기 회사에서 디지털 회사로 한 번 변신했고,콘텐츠 회사로 또 탈바꿈했다. 이런 변혁은 국가 경제에서도 필요하다."

⊙기업 경영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나.

"기업 경영자에게는 3대 요소가 필수적이다. 첫 번째는 비전과 전략 제시다. 두 번째는 그 비전과 전략을 확실히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세 번째는 회사 내 인재를 잘 키워 그 같은 실행이 지속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좌우된다. 비전-실행-인재가 트라이앵글로 조화를 이뤄야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


⊙CEO의 제2 인생 모델 만들것

▶내년이면 고희(古稀)인데 언제까지 일할 계획인가.

"일단 퀀텀리프라는 컨설팅회사를 만들었으니,이 회사와 사원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가 없어도 일본 경제와 세계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은 게 꿈이다. 기업 CEO의 제2 인생에 대한 롤모델(role model)을 만들고도 싶다. 얼마 전에 한 사원으로부터 책을 선물받았는데,책 제목이 '95살까지 일하는 법'이더라.그때까지 일하려면 나는 아직도 25년 남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할 것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88)도 90세에 가깝지만 대외연설도 하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