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지 않으면 썩는다."

'한국 최초의 책 디자이너' 정병규씨(61)가 제1원칙으로 삼고 있는 명제다.

그는 1970~80년대 단순한 장정(裝幀)수준에 머물렀던 출판계에 책의 주제에 맞는 표지 디자인과 내용에 어울리는 '꼴'을 만드는 북 디자인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그의 디자인 작업은 늘 실험적이었으며 그 결과물들은 한국 북 디자인 역사의 새로운 기록이 됐다.

작업하기 전 원고 내용을 꼼꼼히 읽기로 유명한 그는 '책의 주제를 정확히 꿰뚫는 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색 톤 바탕에 두 글자만 넣어 디자인한 한수산 소설 '부초(浮草)'와 이문열의 '삼국지' 표지 디자인이 대표적인 예다.

고려대 불문과 시절 고대 학보를 통해 편집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70년대 신구문화사,민음사,홍성사를 거치며 편집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손길을 거쳐 표정과 몸을 갖게 된 책들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다 보니 출판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0년대 민음사 시절 박맹호 회장을 잊을 수가 없지요. 제게 전권을 줬거든요.무엇이든 제가 하는 대로 놔뒀어요. 그러다 보니 늘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했고 그 묵시적인 원칙이 새로움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작업한 책은 3000여권.박경리의 '토지',황석영의 '장길산',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월간 '포에지',계간 '당대비평' 등 그는 책에다 수천 가지의 표정을 입혀왔다.

지난해 대표적인 작품 500여권을 모아 영월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한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현역 디자이너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에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어느 날 오후,네 시간의 연이은 수업이 끝나고 6시가 됐을 무렵 학생들이 '휴,이제 끝났구나' 하고 가방을 챙기려 할 때 정병규 교수가 "자,저녁 먹고 또 하자"고 말했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일화는 그의 열정이 어디까지인지 잘 말해준다.

그가 본격적인 북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1979년 유네스코가 주최한 편집인 연수차 일본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타이포그라피,북 디자인이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새로운 공부에 대한 욕심과 함께 한국 출판의 현실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30대 초반에 편집자와 경영자,디자이너 중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일본에서 북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에 충격을 받고 직접 북 디자이너를 만났던 게 '완벽한 전향'의 계기가 됐지요."

그리고 1982년,36세의 그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구의 북 디자인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많이 섭렵했지만 끊임없는 갈증이 생겼습니다. 알파벳 문화권에 푹 잠겨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요."

파리에서 활자 중심의 편집디자인으로 유명한 에스티엔느 디자인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1984년 정디자인 사무실을 열며 본격적인 북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다.

활자를 사랑하는 남자.책 표지는 그의 활자들이 뛰어놀고 살아 숨쉬는 생태계다.

그 속에서 활자들은 고딕처럼 강인하고 명조처럼 부드럽게,때로는 손멋글씨로 디자인한 '풍운'처럼 새롭게 태어난다.

"지금 디자인은 이미지가 활자를 억압했던 시대를 지나 활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활자가 과거 텍스트의 정보 전달 기능만을 담당했던 종속적 존재를 벗어나 스스로 이미지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주체적 존재로 독립한 것이지요."

그의 디자인 세계를 꿰뚫는 특징은 활자와 단아함이다.

활자를 넉넉하게 감싸는 여백이 주는 담백한 맛.그것은 디지털의 스피드와 이미지 과잉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맛일지도 모른다.

디지털의 광풍이 몰아치던 한때 책의 종말론이 들끓었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 디지털 시대 책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디지털의 내습은 문명사적인 문제입니다. 활자책의 종말을 얘기한 사람들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디지털의 우위를 맹신했지만 지금 책의 죽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디지털주의자들은 구두도 운동화도 신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똑같은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종이와 LCD모니터는 활자를 담는 기능은 같지만 인간의 오감에 전달되는 맛은 다르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에는 각각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디지털도 아날로그도 100%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대립구도로 몰고 가면 안 되지요.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최근 출판업계에서는 과거와 전혀 다른 북 디자인들이 시도되고 있다.

고무표지를 입히는 등 디지털이 하지 못하는 책의 '촉각성'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다.

이는 디지털 출판과 차별화하려는 생존방편일 수도 있지만 책의 물성(物性) 자체에 대한 재발견이자 아날로그적 가치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디자인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시대입니다. 모더니즘 시대 기능에 종속됐던 디자인은 이제 독립했습니다. 따라서 디자인이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요."

책에다 격을 입히는 북디자이너 정병규.그는 기능이 평준화된 시대에는 디자인적인 가치가 제품의 '격(格)'을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책은 문화 생산의 기본이며 북 디자인은 그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책이야말로 저에겐 큰 느낌표로 다가오는 세계입니다."

글=이철민 기자 presson@hankyung.com

사진=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