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돌려막기'같은 면책 결격사유가 있더라도 개인파산자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빚을 일부가 아닌 전액을 면책해 줘야 한다는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개인파산자에게 채무의 일부만 면책해줄 경우,다시 경제적 파탄에 빠지는 악순환을 막기 위해 모든 채무를 면책해 주도록 법관의 재량면책 기준을 제시한 첫 결정이어서 주목된다.

대법원 2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파산자 김모씨가 "모친의 질병 치료에 소득 전부가 들어가는 상황에서 채무의 일부를 면책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부당하다"며 낸 면책 신청사건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8일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김씨는 직장이 없을 뿐 아니라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서 투병 중인 모친과 두 자녀를 부양하는 처지여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없다"며 "잔존 채무를 남겨둘 경우 다시 파탄에 빠지는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돈을 꾸거나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생계를 꾸려오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속칭 '돌려막기'와 '카드깡'으로 이자를 갚아오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가 축소돼 파산했다. 이어 개인파산.면책 심사 과정에서 김씨가 아파트 보증금을 빼내 다른 채권자들 모르게 처제에게 꿨던 500만원을 변제하는 등 결격사유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2심 재판부는 변제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많은 빚을 지며 카드 돌려막기와 카드깡을 일삼은 것은 면책 불허가 사유에 해당하지만 신용카드는 이자 변제와 모친의 질병 치료비 인출 등에 사용한 점을 감안,채무의 70% 면책을 결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채무자의 경제적 갱생 도모가 개인파산제도의 근본 취지인 만큼 채무자가 일정한 수입으로 빚을 갚아나갈 수 있을 것으로 소명될 경우에만 일부면책을 허용해야 한다"며 김씨에게 전액면책 결정을 내려줬다.

그동안 채무자들이 일부 채무를 면책 받고도 남아있는 빚으로 인해 또 다시 경제적 파탄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감안한 이번 판결은 파산자의 경제적 재기를 돕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일선 법원에서 파산 선고의 '가이드라인' 역할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원 안팎에선 이번 판결이 개인파산자들의 도덕불감증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잠재적 파산자가 43만~112만명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재량면책의 기준을 폭넓게 제시함으로써 면책 신청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 용어풀이 ]

◇재량면책 제도=채무자가 면책 결격 사유가 있더라도 법관이 딱한 사정이나 회생을 위한 노력을 감안해 재량으로 빚을 줄여주는 것이다.

채무자가 경제활동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으로 모든 채무를 변제할 수 없을 때 파산을 신청하지만 파산선고가 나더라도 법원의 면책 결정을 받아야 비로소 빚이 청산된다.

그런데 카드깡이나 돌려막기,일부 재산도피 등의 결격사유가 드러나면 면책이 불허된다.

다만 면책 불허 사유가 있더라도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이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한 노력이 인정되면 법관의 재량에 의해 채무의 일부나 전부가 탕감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