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의 짧은 머리에 도톰하게 나온 배.그 위에 걸쳐진 흰색 재킷.

한 눈에도 디자이너임을 직감할 수 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흰색 재킷을 소화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날씬한 20대만 흰색 재킷을 입으란 법 있나요.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데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디자이너에겐 '크리에이티브(창의성)'가 생명이잖아요.개성있는 옷도 크리에이티브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자주 입습니다."


최상탁 GM대우 디자인센터 이사(47)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자동차 디자이너이자,데이비드 라이언 전무와 함께 130여명에 달하는 GM대우 디자인팀을 이끄는 지휘자다.

그는 요즘 시쳇말로 '기분이 업'돼있다.

그가 초기 디자인 과정에서부터 총책임자로 관여한 윈스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GM대우의 첫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인 윈스톰은 세련된 디자인과 안정된 성능으로 지난 7월 출시되자마자 현대자동차 싼타페에 필적할 수준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윈스톰 개발은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되기 직전인 2002년 초에 시작됐다.

당시 대우차의 디자인을 총괄하던 최 이사에게 'SUV를 디자인해보라'는 숙제가 떨어진 것.SUV는 처음이었던 탓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해낸 모델이 그해 11월 선보인 '스코프'였다.

"당시만 해도 SUV와 쿠페를 결합한 모델은 흔치 않았습니다.

SUV는 편안하지만 둔탁해보이고,쿠페는 날렵하지만 비좁은 탓에 이들의 장점만 뽑아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산고 끝에 내놓은 스코프에 대한 반응은 꽤나 뜨거웠습니다."

GM대우 디자인팀은 스코프를 기반으로 또 다른 컨셉트카 개발에 들어갔다.

순수한 컨셉트카인 스코프보다 양산 모델에 한단계 가까운 컨셉트카를 내놓기로 한 것.디자인팀에 던져진 화두는 세련되고,스포티하면서도 '마초(macho·남성적인)'이미지를 담아내라는 것이었다.

"세련되고 스포티한 이미지를 그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마초'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한편에선 보디빌더 같은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선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이소룡 같은 매끈한 몸매가 낫다고 하고…."

GM대우 디자인팀의 선택은 군살없이 매끈하면서도 적당한 근육이 적절히 조합된 육상선수였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100m 달리기의 1인자 칼 루이스가 출발선상에서 대기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2004년 9월 파리모터쇼를 통해 첫선을 보인 컨셉트 카'S3X'는 일부 디자인 변경을 거쳐 올초 '윈스톰'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윈스톰과 중형세단 토스카는 GM대우 디자인에 새로운 시대를 연 모델들입니다.

이탈리아 디자인업체인 '주지아로'의 도움을 받은 이전 모델과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GM대우 디자인팀이 그려냈거든요.

과거 주지아로가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팸플릿에 '디자인=주지아로'로 나갈 땐 비애감마저 느꼈는데…. 자랑스럽고 뿌듯합니다."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을 지낸 박종서 국민대 교수는 윈스톰의 디자인에 대해 "무언가에 억압된 듯한 느낌을 주던 옛 대우차의 디자인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며 "다만 GM대우만의 독창성은 아직 다소 부족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최 이사가 평생의 직업을 만난 건 꼭 20년 전인 1986년 대우차에 입사하면서다.

중앙대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최 이사에게 당시 자동차 디자인은 생소한 분야였다.

"솔직히 입사 전까지는 자동차 업체에 디자인실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공업디자인 졸업자=전자업체 취업'이란 공식이 있었거든요.

모든 걸 새로 배웠습니다.

한때는 30시간 동안 한숨도 안자고 일할 정도였습니다."

최 이사에게 자동차 디자인의 최대 매력 포인트는 영화나 뮤지컬 같은 '종합예술'이라는 것.가령 전자업체 디자이너는 오디오 등 제품만 디자인하면 끝이지만,자동차 디자이너는 오디오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계공학이나 소비자 심리,마케팅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시트 색상을 포함한 내부 인테리어를 잘 꾸미기 위해 패션 감각과 조형미까지 익혀야 한다.

소비자들의 오감(五感)을 만족시키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가 할 일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게 최 이사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디자이너가 만족하는 차'를 만드는 건 절대 금물.최 이사는 "디자이너가 아닌 소비자들이 만족하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디자인 원칙을 갖고 있다.

예컨대 '더 멋있게 꾸미고 싶다'는 디자이너의 욕심 때문에 마티즈의 내·외장을 화려하게 만드는 건 저렴하고 실용적인 차를 원하는 마티즈 고객들의 요구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