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아 고맙다"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대∼한민국' 함성 속에 한동안 축 처져 있던 남성들의 어깨에 모처럼 힘이 실리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끼리 월드컵 중계방송을 함께 시청할 때 축구 규칙이나 선수 이름을 잘 모르는 여자들에게 설명을 해줄 기회가 생기면서 가장이나 남자친구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

특히 최근 사회 진출이 크게 늘어난 여성들에게 치여 제대를 기를 못 펴고 살아온 `약한 남자'들에겐 한껏 고조된 월드컵 열풍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평소 말도 잘 걸지 않던 중학교 1학년짜리 딸을 둔 회사원 류모(49)씨는 축구 때문에 오랜만에 아빠 노릇을 한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

류씨는 20일 "지난 13일 함께 토고전을 보던 딸이 `아빠, 오프사이드가 뭐야?' 하고 묻길래 신이 나서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며 "최근 부녀지간에 대화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었는데 월드컵을 매개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임모(42)씨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던 아내가 축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와 정성껏 대답을 해주고 나서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며 칭찬을 들었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존경스런 눈빛을 느꼈을 땐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한다.

임씨는 "아내가 축구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로부터 엄마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서인지 축구 관련 책을 사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해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공연기획 분야에서 일하는 한승원(29)씨는 19일 새벽 한국 대 프랑스전 경기를 친구들과 단체 관람하면서 평소 갖고 있던 축구에 대한 지식을 한껏 뽐냈다.

한씨는 "여자친구들 9명을 포함해 친구 20여명과 함께 응원전을 벌였는데 경기를 보면서 남자들끼리 경기 상황을 재현하며 선수들의 플레이를 놓고 열띤 토론을 했다"며 "여자들 앞에서 모처럼 아는 체 좀 했다"며 껄껄 웃었다.

여자친구와 호프집에서 프랑스전을 본 대학원생 최모(29)씨도 "경기규칙을 잘 모르는 친구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자 훨씬 재미있어 하더라"며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평소와 다른 걸 느꼈다"며 흐뭇해 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y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