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m 높이의 파도에 가라 앉았다가 떠오르기를 되풀이하는 순간에도 이 구명정을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에 죽을 힘을 다해 버텼습니다." 지난 20일 북한 해역에서 침몰한 화물선 파이오니아나야호에서 천신만고 끝에목숨을 건진 이상민(24.2등항해사)씨와 박기웅(19.갑판원)군은 2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가족과 회사에 전화를 걸어 침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한국인 선원 9명을 포함, 모두 18명의 선원이 타고 있던 파이오니아나야호에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지난 20일 오전 5시 30분께. 각자의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씨와 박군은 비상사태를 알리는 선내 벨소리를 듣고 갑판으로 뛰쳐 나왔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집채만한 파도가 하늘을 덮은 채 뱃머리를 때리자 2천826t급 화물선 파이오니아나야호는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씨는 몸의 중심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60마일 권역 내에 있는 선박들이수신할 수 있는 VHF무전기로 계속해서 구조요청을 보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배는 물속에 잠겼고 구명조끼 하나에 몸을 맡긴 이씨와 박군도 배에서 튕겨나왔다. 바다 깊숙이 빠졌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눈에 띤 20인승 구명정 한척은 자신들을 지켜 줄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구명정에 올라 탄 이들은 3시간여 동안 구명정과 함께 파도에 휩쓸리며 사투를 벌이던 중 오전 8시35분께 이곳을 지나던 러시아 상선 밸러리 마슬라코프호(600t급)에 구조됐다. 이 선박에 이어 얼마 후 사고해역을 지나던 러시아 상선 맥심미하이로프호도 사체 6구를 발견했으나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사체 인양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구조된 베트남인 선원 2명과 함께 자신들을 구조한 배를 타고지난 21일 오후 러시아 나홋카항에 도착, 러시아 총영사관의 보호 아래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호텔로 이동했다. 러시아 총영사관 박 승 부영사는 "생존자 2명의 X-레이 검사 등 기초검사를 실시한 결과 이씨가 발목 인대가 늘어나 깁스만 했을 뿐 두 명 모두 건강은 양호한 편"이라며 "출국수속을 밟아 3∼4일 내에 귀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연합뉴스) 강종구 기자 inyon@yna.co.kr